[페로칼럼] 실력 있는 유통을 키워야 메이커가 산다
[페로칼럼] 실력 있는 유통을 키워야 메이커가 산다
  • 김홍식
  • 승인 2024.03.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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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페로타임즈 대표
김홍식 페로타임즈 대표

올해로 철강 전문지 기자를 시작한 지 만 30년이 지났다. 필자가 처음 맡은 취재처가 유통이었다. 문래동과 시흥 철재상가, 지방에 있는 공단을 찾아다니던 일이 어제 일 같다. 그만큼 애착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었던 대형 유통점의 2세는 이제 대부분 사장이나 임원이 됐다. 2~3년 터울로 바뀌는 메이커 임원과는 달리 오랜 기간 알고 지내다 보니 동네 후배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요즘 철강 유통업체가 처한 어려움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국내 철강 유통산업은 기로(岐路)에 서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외형은 커졌지만 5% 수익은 까마득한 옛 얘기가 됐고, 사람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지 오래다. 가공공장은 40세 미만 젊은 층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 자리를 대부분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가동 일수도 들쑥날쑥하고, 가공비는 몇십 년째 화석(化石)처럼 변화가 없다. 가공설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가공업체는 월급이 아닌 시급 형태로 공장을 가동하는 곳도 있다. 한국 철강 유통은 이대로 괜찮은가?

한국의 철강재 유통구조는 매우 독특하다. 1973년 포스코의 상업 생산과 함께 시작된 제품 따로, 지역 따로, 수출입 따로 돼 있는 구조는 그간의 공과(功過)는 차치하더라도 그 효능이 다됐다는 생각이다. 세상은 하루가 멀다고 바뀌고 있다. 인구감소와 3D프린팅, 공유경제와 같은 디지털 전환(DX)에 따른 수요 감소는 유통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 많은 전문가가 철강사의 위기 대응 전략이나 성장전략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차제에 철강 유통도 시대 흐름에 맞게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문제는 방법이다. 우선 숫자를 줄이고 대형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양사 대리점(판매점) 숫자만 100여 개 사에 달한다. 왜 이렇게 숫자가 많을까? 메이커로서는 판매가 쉽기 때문이고, 유통사 입장에서는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포스코는 판매점 숫자를 줄이려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판매점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는 수요가 측면에서 보면 번거롭기 그지없고, 비용 증가를 유발하는 구조다. 지금은 숫자가 아니라 경쟁력 있는 똑똑한 유통, 메이커와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유통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대형화가 어렵다면 특화 전략으로 가야 한다. 그중 하나가 복합가공 물류센터와 같은 것이다. 고객사 입장에서 한 번에 원하는 제품을 가공까지 마쳐서 구매할 수 있어 시간이나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 또 단지 내 입주업체까지 통합 마케팅도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단일 유통업체가 하기에는 어렵다. 메이커 지원과 함께 필요하다면 공동투자를 통한 방법도 고민할 가치가 있다. 다만 공동투자는 기획 단계부터 메이커가 공정하고 엄격한 기준을 만들고 선별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AI 시대에 맞는 인재 양성이다. 인재 양성 역시 메이커의 지원이 필요하다. 교육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체계적인 교육이 아닌 도제(徒弟) 방식이 대부분이다. 유통업체 임원은 메이커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 사람의 능력을 폄하(貶下)하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월급쟁이의 꽃은 임원’이라는 말이 있다. 유통업체 직원 시각에서 보면, 오랜 기간 충성을 다한 선배는 임원도 달지 못하고, 임원은 늘 메이커에서 온다고 생각하면 이런 조직에 누가 충성을 다할까? 솔직히 유통담당 기자 30년 동안 느낀 점은 “한국 철강 유통업체는 사람에 대한 투자보다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더 많다.”라는 느낌이다.

AI는 조만간 철강 유통구조도 바꿔놓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는 전담 부서나 △판매 및 가공 외에 차별화에 대한 고민, △인재 육성과 사람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철강 유통업체도 다닐만한 직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도록 힘써야 한다.

네 번째는 정책의 투명성과 일관성이 필요하다. 임원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구호성 정책이 신뢰를 떨어뜨린다. 메이커는 “누구 때문에 먹고 사는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메이커와 유통은 기능이 다르다. 동반자 관계가 되어야 한다. 유통 역시 지나치게 메이커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확실한 수익모델과 변별력을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수요개발(엄밀하게는 수요 확대) 과정 역시 유통이 같이 참여해야 한다. 유통은 자동차의 범퍼와 같고, 군대로 치자면 최전선 부대이기 때문이다. 철강재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형태로는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스틸서비스센터와 같은 가공 공정을 거쳐 최종 수요가에게 전달된다. 수출 역시 앞으로는 코일 형태가 아닌 가공수출이 주를 이룰 것이다. 수출도 물량 공세는 한계에 봉착했다. 남은 것은 중소 실수요가 영역인데, 메이커보다는 유통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많은 유통업체 사장이 푸념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작금의 상황과 주변 환경이 어려운 것은 분명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철(鐵)은 아직 인류 생활에 대체 불가 소재이기 때문이다. “비관론자가 많을 때는 꼭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정녕 버려야 할 것은 과거 성공에 젖어 노력은 뒷전이고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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