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은의 의학이야기] 외과의사 앙브로아즈 파레
[김해은의 의학이야기] 외과의사 앙브로아즈 파레
  • 김해은
  • 승인 2020.11.27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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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외과의학의 아버지, 영원한 군의관으로 불려
르네상스 대표하는 외과의사
김해은 한사랑의원 원장(도봉구 의사회 부회장)
김해은 한사랑의원 원장(도봉구 의사회 부회장)

고대 중세시대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 역할을 했다. 이발소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흰색의 표시 등은 동맥, 정맥, 붕대를 의미했다. 15~16 세기까지 유럽에서 ‘외과의학’은 별도의 의학 분야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내과의사는 닥터(Doctor)로 불렀으나 외과의사는 미스터(Mister) 라고 불렀다. 제빵사, 양조자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으로 생각했다.

르네상스시기에 전쟁의 병장기가 칼과 창에서 화약과 총포류로 전환 되면서 창상 종류가 다양해졌다. 외과수술이 더욱 복잡해졌다. 섬세한 기술이 필요해지자 외과의사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당시의 치료는 내·외과 모두 실험에 의한 해부학과 생리학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 고대의 문헌이나 경험에 의한 의존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해부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당시에는 죄악시 되었던 인체해부를 시도하였다.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는 외과수술에 도움이 되었고 배경에는 근대 외과의학의 아버지 앙브로 아즈 파레가 있다.

앙브로아즈 파레는 프랑스 북서부 도시의 변두리에서 상자를 만들어 팔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족의 입을 덜고자 이발하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머리와 재주가 뛰어난 파레는 열심히 공부하여 외과의사가 되었다. 그는 파리의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잠깐 일한 뒤 군의관으로 전쟁을 치르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파레는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전투를 맞았다. 파레는 이 전투에서 얻은 군인의 창상을 인두로 지지지 않고, 핏줄을 실로 묶어 지혈하는 방법을 개량했다. 상처에 화약이 들어가 기름으로 지지지 않으면 독이 퍼져 죽는다는 당시 의사들의 주장이 틀린 것을 밝혀냈다. 끓는 기름 대신 자신이 만든 연고를 발라 수많은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프랑스 북동부에서 신성로마제국과 큰 전쟁이 있었다. 프랑스군이 적군의 위세에 밀려 후퇴하다 그만 성안에 갇히고 말았다. 전투는 길어지고 부상자가 늘어나자 정부에선 메스라는 도시로 전령을 보냈다. “하나만 보내줄 수 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먹을 것도, 화약도 부족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상자가 많아 더 이상 싸우기 어렵다. 최고의 의사 파레를 보내다오” 그때 파레는 군의관을 그만두고 프랑스 왕의 주치의를 하고 있었다. 파레는 왕에게 자신이 성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치료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적진을 뚫고 파레는 성안으로 진입하였다. 파레가 들어가자 사람들은 온 성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하였다. 사기가 오른 프랑스군은 용감히 싸워 적의 포위를 뚫고 적군을 물리쳤다.

파레는 가는 곳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냈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까지 널리 알려졌다. 파레는 아픈 사람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버리지 않게 만드는 따뜻한 감수성을 가진 의사였다.

파레는 이발의사 출신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대학교수였다. 파레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외과의사, 근대 외과 의학의 아버지, 영원한 군의관 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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