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은의 의학이야기] 문명인은 좁은 법망·타인 부대껴도 자유 느껴
[김해은의 의학이야기] 문명인은 좁은 법망·타인 부대껴도 자유 느껴
  • 김해은
  • 승인 2020.12.10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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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안전 위해 집단화…문화와 문명, 법망 위에 존재
번연계 파충류·신 피질 문화인…두 종의 마음 대치
혼돈 속에 문제 파악 질서로 이끄는 사람이 ‘지도자’
김해은 한사랑의원 원장
김해은  한사랑의원 원장 (도봉구의사회 부회장)

인간의 고민거리는 아직도 대부분 의식주와 자손의 번영에 달려있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밀집되면서 복잡해 졌을 뿐 수렵 채집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높은 산을 오르고 장엄한 자연을 체험한 후에 숭고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 우리의 온전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사는 사람들이 더 숭고한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광활한 스텝지역의 평원을 달리고 영양과 순록을 따라 여행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자연에서 독립된 집단으로 살다가 자연의 위해와 다른 집단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기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다른 집단 보다 더 큰 영역과 인구수가 많은 집단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에 도시와 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를 이루는 집단은 인류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장류는 집단을 이룬다. 대뇌의 신 피질이라는 영역이 클수록 교류하는 집단의 크기도 커졌다.

이로 인해 영장류 별로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다 달랐는데, 긴팔원숭이는 평균 14.8마리, 고릴라 33.6마리, 오랑우탄 50.7마리, 침팬지는 65.2마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영장류 중에서는 두뇌가 가장 큰 인간이 유지할 수 있는 기본 집단의 크기가 최대 150명으로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호주나 그린란드 등지에 아직 잔존하는 원시 부족의 마을 평균 규모 또한 이와 같은 숫자인 평균 150명이다.

각 집단이 이보다 커지면 사회적인 교류에 한계를 느끼고 구성원간의 스트레스는 올라가고 결국 다른 집단으로 새살림을 내야 집단은 안정을 찾는다. 인류는 태아의 두뇌가 커지고 직립보행으로 인한 여성의 골반이 적어져서 출산 시 산도의 진행이 골반의 최대 직경을 지나야하기 때문에 아기의 머리 위치가 돌아서 산모 홀로 출산할 수 없었다. 종종 아이의 엉덩이가 먼저 산도로 진행하여 분만이 시작되면 난산을 피할 수 없었다. 출산 후에도 오랫동안 미숙한 신생아를 돌보아야하기 때문에 부모 이외의 할머니, 이모, 형제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자연스럽게 생존에 필수적인 인원이 늘어났다. 분만과 양육은 집단의 생존과 밀접한 상관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의 벽화와 조각에는 출산에 용이한 풍만한 비너스상이 자주 등장하였다.

인류는 더 큰 집단을 용이하게 관리하기 위해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었다. 문명은 커다란 법망위에 떠있다. 법망이 좁혀오면 더 작은 공간에서만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를 제약 받으면 법망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오랑우탄과 침팬지의 참을성으로는 인간사회의 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허락한 작은 공간에서 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남의 자유를 침해하면 자유를 구속당할 수밖에 없다.

나의 자연 발생적 욕구를 절제하고 남의 욕구를 존중하는 데에는 상황 판단과 인내력이 필요하다. 지도계급은 미담을 재미있게 구성하여 자신의 복종에 대한 의미와 보상을 받는 교육 체계를 만들어 영혼의 세계에 대한 소망과 현실 세계의 질서를 가르쳤다. 그래서 문명은 나의 자유를 스스로 조절하는 자율을 가르치고 복잡한 법망을 만들어 적당한 거리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시스템이다.

인류가 생기고 대부분의 기간을 문명과 관계없는 자유인으로 살아온 인류는 과일을 채집하기 위하여 나무에 기어오르고 사슴을 추적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초원을 달리는 생활에 적응하였지 책상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는 현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의 마음속의 자유의지는 광활한 초원을 달리고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좁은 공간에 둘러싸여 자유를 침해당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수렵채집인들 보다 결코 건강하고 행복하지 않다. 야생의 원시인이 책상 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가상의 공간에 갇혀 있으니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야생의 기억은 억제되고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하기 위해 우리의 한계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두뇌는 영장류에서 얻은 신 피질의 기능으로만은 살 수 없다. 우리가 더 원시적일 때 사용하였던 변연계의 기능을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 변연계의 기능을 주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 피질의 품위 있는 삶을 거부하고 파충류의 단순한 장치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자유가 제한된 좁은 법망 안에서 문화인과 악어가 함께 살기 힘들 듯이 내안에도 두 종의 마음이 늘 대치 상태에 있다.

이 원시의 두뇌와 화해하고 잘 지내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그들이 좋아했던 자연의 세계에서 편안한 안식을 주어야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잠재울 수 있다. 그러나 응급의 위험한 상황에서는 본능이라는 직감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무사할 수 있다. 우리의 태생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이상적인 상태에만 머무를 수 없다. 삶의 현장은 카오스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도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상태에만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훈련이 많이 된 사람은 깊은 통찰력으로 원시적인 본능을 발휘하지 않고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혼란한 상황의 문제를 파악하고 질서의 세계로 이끄는 사람을 지도자라고 한다. 문명에서 파생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해서 문명인이 아니다. 좁은 법망 안에서 타인과 부대끼면서 자유를 느낄 때 비로소 문명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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