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산업의 뿌리를 찾아서 1] 문래동 철재상가
[철강산업의 뿌리를 찾아서 1] 문래동 철재상가
  • 김종대 페로타임즈 대표
  • 승인 2019.07.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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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이룬‘ 산업화의 꿈’…드럼통으로 자동차 만들다

 

문래동은 오래전에 철강 기업이 몰려 있던 지역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중소 철강제조업체들은 도시화에 떠밀려 지방으로 이전했다. 지금은 몇 안 되는 가내공업 형태의 영세 업체들만 남아 있다. 기아자동차도 문래동에서 처음으로 공장을 열었다. 전쟁 고철과 미군이 쓰다 버린 드럼통을 개조하여 삼륜차와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자세히 알아본다. [편집자주]

고(故) 김철호 회장은 1944년 자전거 부품회사인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경성정공은 1952년 회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하고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출시했다. 1952년 3월 국내 최초의 자전거로 생산된 '3000리호'(사진 왼쪽). 기아산업의 삼륜차가 자전거를 실어나르는 모습(오른쪽)
고(故) 김철호 회장은 1944년 문래동에 자전거 부품회사인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경성정공은 1952년 회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하고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출시했다. 1952년 3월 국내 최초의 자전거로 생산된 '3000리호'(사진 왼쪽). 기아산업의 삼륜차가 자전거를 실어나르는 모습(오른쪽). 사진=기아차 사사

 

황량한 늪지였던 문래동

먼 옛날 문래동은 황량한 늪지대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1759년 이전까지 금천현(衿川縣) 상북면 사촌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천현은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으나 경덕왕이 곡양(穀壤)으로 바꾸어 율진군 속현으로 만들었다.”는 부언 설명이다.

잉벌(仍伐)은 순우리말로는 ‘늠내’이다. ‘뻗어나가는 땅’이란 의미이므로 지금의 시흥을 말한 것이다. 금천현은 과천방향으로 약 4.31Km, 안산방향 6.28Km, 서쪽 부평부(인천)방향 6.67Km, 북쪽 양천방향 10.6Km이었다. 노량 방향으로는 9.03Km이며, 서울과는 12.17Km 떨어진 곳이다.
 

문래동 옛 지명 사촌리...조, 강, 장, 피, 계, 윤씨 거주
강물 풍부해 공업입지 적격...해방 이후‘ 철강 메카’ 형성

이규보의 시에 금천현은 “습속이 비록 제나라 땅같이 느리다...”고 쓰여 있을 뿐, 시흥과 과천이야기에 국한 되고 있다. 아마도 문래동의 옛 지명 사촌리는 인적이 드믄 마을이었을 것이다. 사촌리에는 이, 조(趙), 강(姜), 장(莊), 피(皮), 계(桂), 윤(尹), 추(秋)씨 등의 집성촌이 형성하고 있었다.

문래동이란 말은 1952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문래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척박한 땅이 아니라 산업화 도시의 얼굴로 바뀌어 간다. “길은 단 한사람이라도 실지로 걸어가야만 굳어지는 법이다.”고 했던 소설가 박종화님의 말대로 문래동은 숱한 사람들에 의해 단단해 졌다.

문래동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중간 지점이다. 서쪽으로는 경인로와 허리에 맞대고 있어서 개화의 문이 열린 인천으로부터 유입된 서양의 문물이 자연스럽게 거쳐 가던 지역이었다. 더하여 경제활동이 풍부한 서울과 가까웠으니 자연히 교통 편리성과 함께 하천과 강물이 풍부한 이점 때문에 기계공업을 다루던 기업들이 이곳에 정착되었던 것이다.

문래동은 미래의 꿈을 키우는 장소였다.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은 근 70~80년의 지난한 세월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 놓았다. 땅값이 싼 늪지대를 메워 공장을 건설하고, 인근에는 서서히 마을이 형성 되면서 도시다운 형색을 갖춘 것이다.

해방 이후부터 산업화라는 시대의 요구를 당당히 껴안아 ‘철강 메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 냈다. 그 시기는 방직, 자동차, 철도 등의 산업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던 때였다. 이들 산업은 이전부터 포진하고 있던 인천과 영등포 일대의 철강공장으로부터 원자재를 조달 했을 것이다.

산업은행이 1962년에 펴낸 <한국의산업>에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영등포 일대의 거의 모든 군소 철강업체는 코크스의 부족으로 운휴하다시피 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문래동에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몰려들었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업가들도 문래동에 철강제조 공장을 만들어 철강단지를 조성했다.
 

철강제조산업의 뿌리...하동환自, 동일제강, 기아車
동립산업, 일신제강, 부산파이프규모 큰 철강연관산업 모태지역

1960~70년대 후반에 하동환자동차, 동일제강, 기아자동차공장, 건빵을 만들던 동립산업, 일신제강, 부산파이프 등은 규모가 제법 컸다.

그 이전에 문래동과 구로동, 양평동은 공업지대였다. 일제가 설립한 방직공장들은 제외하고, 한국인의 자본으로 가장 먼저 현대적인 공장이 들어선 것은 ‘경성정공’이다. 1944년에 문래동에서 자전거를 생산한 이는 김철호씨. 경성정공은 삼천리자전거의 전신이다. 김철호 회장은 경북 칠곡이 고향이다. 그가 이곳에 공장을 건설한 이유는 입지조건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자전거는 사치품이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전용 운송수단이었다. 그런 자전거를 한국 땅에서 만들기까지 김철호 회장은 많은 난관을 겪는다. 김철호 회장은 어린 시절 오사카로 건너가 철공소(삼화제작소)의 견습공으로 취직을 하여 볼트와 너트를 만들었다.

1920년대에 미국이 대공황을 맞아 일본도 어려운 환경에 처하자 김철호 회장은 ‘부품이 아닌 자전거를 만들자’고 제안하여 부도직전이었던 삼화제작소를 회생시킨다. 그리고 1944년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자전거부품공장인 경성정공을 문래동에 설립한 것이다.

철판을 두드려 재생하거나 조립하는 일에 매달렸던 김철호 회장은 자전거 수요가 급증하자 1952년 기아산업을 설립하여 부산으로 생산 거점을 옮겼다.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철판을 두드려 자전거를 생산하고 드디어 기아자동차까지 생산하게 만든 원천은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한국타이어 첫공장

조선다이야 영등포공장(1942년 완공)은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해 조선 내에 타이어 제조공장이 필요해지자 1941년 일본 ‘브리지스톤’이 한국에 진출한 것이다. 한국타이어 첫공장 ‘조선다이야’ 영등포 공장이 들어선 곳은 현재의 신도림 역 인근이며, 부지는 14만평이나 된다. 이 공장에서는 트럭과 자전거 타이어를 합쳐 하루 300개, 연간 11만개의 타이어를 생산했다.

1955년에 이 회사는 ‘한국다이야’로 개명하였고, 1958년에 효성그룹이 인수하여 오늘의 ‘한국타이어’로 성장시켰다. 공장은 모두 대전과 금산으로 이전하여 당시의 공장 모습은 볼 수 없다. ‘하동환자동차’는 자동차정비기술자였던 하동환씨가 설립한 이 공장은 미군용 트럭을 개조하여 자동차를 만들었다.

1967년에는 V67모델 20대를 베트남에 수출하기도 했다. 또 이 회사는 초기에 철판 구입이 어려워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버스를 만들었다. 이 버스는 서울과 전국에서 운행 되었다. 1977년 동아자동차로 개명 되었다가 1988년 쌍용그룹에 인수되었다.

규모가 큰 공장들이 당산동과 문래동에 들어선 이유는 경인선 철도와 경부선이 교차하여 원재료 수입과 완제품의 지방공급이 쉬웠고, 안양천과 도림천 등 주변에 산재한 하수시설이 공장부지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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