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영의 법률이야기] 4차 산업혁명시대 법조인의 역할
[정관영의 법률이야기] 4차 산업혁명시대 법조인의 역할
  • 정관영
  • 승인 2020.10.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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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 변호사
정관영 변호사

법조계에도 AI가 법률가를 대신할 것이라는 등 서늘한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아직까지는 AI가 판결을 대신하거나 변호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한데, 그 논거로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AI에게 맡기는 걸 인간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사회적 합의나 공감을 기초로 한 판결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등이 제시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법과 제도’가 무엇이기에 법률가의 일을 기계가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걸까? 이참에 새삼스럽지만 법과 제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법조인들에게 어떤 의미이고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우선 법과 제도는 문자로 기술돼 있기에 문자의 기원부터 생각해보게 됐다. 문자가 생기기 전까지 인류의 지혜는 제한적인 방법(세대를 이어 내려온 관습이나 풍습, 현명한 노인의 구전 등)으로만 후대에 전수될 수 있었고, 기억에 의존해 전수하다 보니 단락이 군데군데 끊기거나 부정확하여 의미 있는 정보로 축적되기 어려웠다.

문자의 등장은 체득한 경험이나 생각해낸 사유물을 ‘기록’할 수 있게 된 점에서 매우 혁명적이다.

기록은 남는다. 기록은 쌓인다. 문자는 문명 축적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문자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일부 특권층뿐이었고 그들만이 지식을 독점하였기에 인류의 지혜가 축적되는 데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문자를 배운 자가 지식을 틀어쥐고, 지식을 쥔 자가 사회의 상부구조인 법과 제도를 좌지우지한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이 시점에 ‘인쇄술’이 발명되었는데, 인쇄술은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사람이 일일이 수기로 써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 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대단히 노동집약적인 필사 작업에서 한번 판만 잘 만들면 여러 권의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 작업으로의 질적 변화. 목판에서 금속활자, 석판으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종래 특권 계층만 읽을 수 있었던 책과 글이 다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법과 제도를 만들고 다룬 주체는 여전히 군주, 귀족, 법조인 등 일부 특권계층에 한정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근대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공업,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부각된 시민 계급은 봉건 체제 타파를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그들의 실제 욕구는 자신들의 부에 상응하는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왕과 귀족만 법률을 제정해서는 안 되며, 자신들도 법의 제·개정에 관여해야겠다는 것이다.

정치 참여와 권력 획득의 화룡정점은 성문화(成文化)된 법조문이기 때문이다. 이후 산업혁명이 가져온 종이의 대량 생산, 윤전인쇄 같은 인쇄술의 발달은 거의 모든 민중들이 싼 값에 책을 접할 수 있게 하는 윤활유가 되었고, 보통교육 사상과 맞물려 농민이나 노동자들도 문자와 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이들의 영향력도 점점 강해졌다.

법조문을 읽을 수 있는 계층이 거의 모든 계층으로 확산된 것이다. 오늘날 문명국가의 국민들은 수권자에게 정치 참여, 법과 제도의 제·개정, 권력 구조의 재·개편에 관여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근·현대에 들어선 뒤에도 법조인들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대했는데, 이유는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전문화·세분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가 분화하면서 전문가들의 영역도 더욱더 세분화되기 시작했고, 법조인들의 영역도 확대되는 듯 보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회가 복잡다단해질수록 전문가만이 해석할 수 있는 세부적인 영역이 늘어나 일자리도 함께 늘어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법조인만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과연 타당할까?

오늘날 전문가들은 영역을 더 잘게 쪼개어 그것을 선점하기 위해 극진히 노력한다. 매우 특수한 영역에서 의미 있는 판례를 만들어 내거나, 특수한 영역을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미시의 세계를 탐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문가라고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문가라고 불려야만 자신이 비빌 언덕이라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겠지만 이게 다일까? 이런 식으로 전문가들의 영역이 계속해서 확장되어 갈까?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볼 때의 위험은 누구나 안다. 어떤 일을 할 때 사실관계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를 조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컨대 소송에서 전략을 잘못 잡으면 지엽적인 사실을 증명해봤자 패소 판결로 귀착하는 것처럼. 오늘날 전문가들이 갈수록 늪에 빠지는 길이 끝없는 세분화와 전문화가 아닐까? 변호사들도 처음 보는 법률들이 수없이 늘어나고, 생소한 사안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대.

그 결과 사실상 해당 분야에 비전문가인 변호사들 간의 사실관계 다툼에 판사도 자신이 없어 감정 결과가 판결을 좌우하거나, 해당 분야와 동떨어진 판결이 나오는 현실. 이러한 현실이 전문가를 표방한 ‘비전문가’들이 늘어나는 것을 방증하는 건 아닐는지.

이 와중에 AI가 등장하였다.

빅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 유형별로 분류하는 일은 이제 AI가 인간보다 잘한다. 극히 세분화된 영역 또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법률가라는 직업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수습 변호사가 하던 일을 AI가 대신하면서 업무의 효율성이 훨씬 증가하고 의뢰인들을 위한 더 큰 가치(공감, 정교한 소송 전략 짜기, 이업종 간 협업을 통한 창의적인 솔루션 제공 등) 제공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절반 가까운 변호사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 또한 확실해 보인다. AI보다 디테일하지 못하면서 융합도 못하는 전문가의 운명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건 기우일까?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자.

‘법과 제도’란 무엇인가?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칙이다. 

옛날에 사회 구조가 단순할 때, 분업이 별로 안 돼 있을 때, 일부 사람들만 문자를 읽고 법과 제도를 다룰 수 있을 때에는 그 규칙이 복잡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법조인들이 사회 전반을 이해하고 통섭할 수 있었고, 특정한 사건의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복잡다단해지고, 분업이 더 세분화되며, 거의 모든 국민들이 문맹을 벗어나 법·제도에 대한 이해력을 함양하게 된 오늘날,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칙은 너무 복잡해져서 이제 변호사들조차 정확하게 다루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오늘날 대의제에서 입법부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입장과 현안을 종합한 법안을 발의할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고, 행정부도 서로 다른 주무관청들이 이것저것 중복된 규제들을 내놓아 사회의 본모습과 동떨어진 조문들이 이 법 저 법에 덕지덕지 붙여진다.

이 상태로 계속 갈 수는 없다.

장인(匠人)의 수공업에서 대량생산, 다품종 소량생산을 거쳐 3D프린터를 이용한 개인 맞춤형 생산에 다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법률 전문가들이 스스로를 세분화·전문화하여 유지해온 수공업 방식의 법률서비스 제공 양태 역시 질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유는 법과 제도를 다루는 작용을 법조인들이 독점하는 것을 소비자나 이용자들이 더 이상 원치도, 허락하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하다.

그렇다면 법조인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법과 제도의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어떨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는 법조인은 스스로가 명예로운 일을 하는 전문 직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칙’을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맞게 해석·적용·변경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전문성, 통섭, 융합. 이 삼각지 중심에 AI가 만들어낼 수 없는 ‘가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한쪽 다리인 전문화에서만 가치를 찾기는 어렵게 됐다. 이제 법과 제도의 해석을 독점하는 데서 우리의 가치를 찾을 게 아니라, 소비자들도 미처 모르는 가치를 발굴하는 데서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 즐거운 고민을 함께 해보는 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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