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과 인문학⑨] 제국(帝國)으로의 발전 조건, 이집트와 그리스의 철(鐵)
[철강과 인문학⑨] 제국(帝國)으로의 발전 조건, 이집트와 그리스의 철(鐵)
  • 정하영
  • 승인 2020.06.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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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아시리아와 다른 길을 걷는다.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의 고급 철 생산 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철기를 만들고 부국강병을 이룩하게 된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본격적으로 철기를 생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류 최초의 철을 이용한 사례는 기원전 3200년경의 것으로 이집트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목걸이에 들어간 철제 구슬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 상태의 철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우주에서 떨어진 운철(隕鐵)로 추정된다.

이집트인들이 직접 철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100~800년경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오랜 기간 청동과 석기가 주류를 이루었고 철이 청동을 대체한 것은 기원후 1세기경이 되어서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자원 부족과 여러 여건상 철에 대한 욕구가 크지 않았던 탓으로 해석한다.

우선 이집트는 여건상 높은 온도를 얻기 위한 땔감이 부족했다. 더 높은 온도를 얻기 위해 많은 땔감을 필요로 하는 철의 제련은 적합지 않았다. 두 번째로 철이 주로 사용된 것은 무기와 농업인데 이집트인들은 청동무기를 철제무기로 대체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농업의 경우 토양 특성상 철제 농기구가 별로 필요치 않았다. 나일강의 매년 범람으로 농지를 갈아엎을 필요성이 별로 없었고 토질 역시 부드러워 청동제 농기구로도 충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소재의 선택에서도 심미적(審美的)인 요소를 중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철의 희소성(운철뿐)으로 가격은 높았지만 사실 금이나 청동에 비해 아름답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철은 녹이 슬면 얼룩덜룩한 적갈색으로 흉하게 변하고 부스러지기 쉽다. 이런 철의 특성 때문에 아름다움을 우선시하는 이집트인들에게는 큰 매력을 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이집트에서 철기 문명은 화려하게 꽃피우지 못했으며 이집트가 히타이트, 아시리아와 같은 제국(帝國)으로 발전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아시아 지역의 페니키아와 헤브라이
서아시아 지역의 페니키아와 헤브라이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서 발원한 철기 문명은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그리고 중국, 인도 등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된다. 기원전 12세기 히타이트가 쇠퇴하면서 제철기술이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아메리카와 호주를 제외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로 확산되면서 진정한 철기 시대가 시작된다. 물론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제철 기술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시기는 기원전 1000~500년경이라고 볼 수 있다.

바다(해상) 민족에 의해 히타이트가 몰락하면서 제철 기술의 확산 여건이 만들어졌다면, 실제로 이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이들이 존재한다. 바로 페니키아인들이다. 상업과 무역에 종사했던 이들은 철의 가치를 누구보다 빨리 간파하고 교역 물품으로 삼았다.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를 기반으로 했던 페니키아는 기원전 1100~800년 지중해 교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페니키아의 무역선에는 서아시아의 철기가 가득 실렸고 지중해 각지에서 거래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철기를 수입하는데 만족했지만 점차 그 욕구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때마침 나라의 멸망으로 갈 곳 없어진 히타이트 대장장이들과 그 후손들이 페니키아의 무역선을 타고 지중해 전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철기 제품이 아니라 그 근간인 제철 기술이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제 지중해 사람들은 더 많은 철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 지중해 사람들 중 유럽의 고대문명을 처음 일궈냈던 그리스도 있다. 그리스는 기원전 2000년경 미노아인이 건설한 그리스 최초의 크레타 문명을 시작으로 기원전 1500년경 미케네 문명이 그 뒤를 잇는다. 이어 기원전 1100년경 철기로 무장한 도리아인이 남하해 미케네 문명을 몰락시킨다. 학자들은 미케네 문명이 파괴된 이후 그리스 반도가 300여 년간 암흑기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시기 그리스반도에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나면서 그리스 문명의 부흥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초기 시인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보면 이 때 이미 그리스에서는 철이 활발히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리아스’에 운동 경기의 승자에게 철괴(鐵塊)를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호메로스와 견주어지는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철의 시대로 분류했다. 당시 그리스가 철기 시대로, 철의 영향력이 매우 큰 사회였음을 추정 가능케 한다.

헤시오도스는 철의 시대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멸망할 것으로 예언했다. 결국 수백 년이 지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쇠퇴하지만 철의 대제국 로마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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