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과 인문학⑭] 동아시아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였다
[철강과 인문학⑭] 동아시아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였다
  • 정하영
  • 승인 2020.10.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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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만들어진 철기는 주변 여러 나라에 전래되었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 시대(BC 206년~AD 220년) 국가 전매기술로 보호해 타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매우 제한했지만 상호 긴밀한 왕래가 있었던 한국과 일본으로는 비교적 용이하게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의 철(鐵)을 분해하면 (金+哉+王)이 된다. 금속 중에 왕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한자로 철(銕)로도 표기했는데 (金+夷)은 만주와 한반도에 살던 동이(東夷)족이 철을 잘 만들고 다루었음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지역 고대 야철 유적의 공통점은 대부분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인데 일본도 비슷하다. 하천 상류에서 해안으로 광석이 이동하는 동안 자연 선광되어 집적되는 사철의 채취뿐만 아니라 숯과 철제품의 수송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생산 제품은 괴련철을 가공하여 생활도구나 농기구, 무기를 만들거나 용융 선철을 주형에 부어 주물로 제품을 만들었다.

높은 성능과 품질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초강법 등을 이용해 강철에 가까운 가단주철(可鍛鑄鐵)을 만들어 사용했다. 주로 무기 등의 용도였지만 초강법의 경우 대량생산이 불가능해 보급은 제한적이었다.

고대 문화 배경의 한반도 지도 ( 출처 = ZUM학습백과 )
고대 문화 배경의 한반도 지도 ( 출처 = ZUM학습백과 )

한반도에 철기가 들어온 시기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중국의 전국시대 후반인 기원전 4~3세기 무렵 고조선을 통해서라고 보고 있다. 고조선은 인접해 있던 연나라로부터 철기를 수입한 이후 한 단계 더 발전한 철기 생산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직접 생산은 물론 나아가 수출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철을 바탕으로 동북아의 강자로 떠올랐지만 더욱 강력했던 통일제국 한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한나라는 고조선 자리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이중 낙랑군이 중국과 한반도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교역을 중계했다. 중국에서 한층 개량된 제련 기술과 새로운 철기 제품이 낙랑군을 거쳐 한반도 북부로 전해졌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철기 생산은 전쟁에서의 승리 욕구로 더욱 활발해진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전쟁이 철기 전성시대와 연결된 것이다. 이후 철 생산 기술이 가장 발달한 곳은 한반도 남부의 변진(弁辰, 가야/신라)이다. 이 지역의 원래 풍부한 철광석 덕분에 제련 기술이 발전하고 독보적 위치에 오르게 된다. 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성 ‘김(金)’이 쇠를 뜻한다거나, 신라 제 4대 ‘탈해왕’ 역시 대장장이 출신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금관가야의 철기(부산 복천동 출토품)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금관가야의 철기(부산 복천동 출토품)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철과 관련한 한반도의 주요 이슈의 하나가 3~4세기 동아시아 ‘철의 왕국’이 과연 어느 나라인가 하는 논란이다. 최근까지 교과서에도 가야로 실릴 만큼 변한이 통설로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교육받은 우리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간행 ‘조선사 별록’을 사실로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오류라는 주장이 최근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전제로 한 역사 재구성, 허구라는 주장이며 오히려 여타 모든 역사서나 지금까지의 고고학적(유물) 발굴 결과도 신라(진한)에 더욱 방점이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보다 더 체계적인 발굴과 연구를 통해 한반도의 진정한 ‘철의 왕국’을 규명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근거 없는 식민사관과 일본의 얼토당토않은 역사 주장을 바로잡아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아무튼 한반도에 제철산업이 발달했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서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기원전 한반도 경상도 지역에 변한과 진한(변진한)이라는 부족국가가 철을 생산해 한(韓), 예(薉), 왜(倭) 등 주위국가에서 사갔고 화폐로도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변진한의 제철 기술은 중국 진(秦)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갖고 왔으며 생산되는 철의 양이 풍부하고 품질이 우수해 주위국가와의 교역품으로 무역이 활성화되고 다양한 철깅문화를 이루었다고 기술돼 있다(후한서 권 085 동이열전 제 075). 이 시대의 주요 철 유적은 배천 석산리, 봉산 송산리, 신천 구원산 등인데 주로 해면철을 생산했다.

고구려의 경우 아차산 유적에서 나온 화살촉을 분석해 보면 생산과 가공이 용이한 괴련철을 소재로 형태를 만든 후 강도, 경도 및 인성이 요구되는 화살촉 끝은 강을 단접한 후 담금질을 해 마르텐사이트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는 화살촉 소재가 주철이 아니고 가단주철 내지는 주강이라는 의미다. 고구려인들은 초강법을 이용해 가단주철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왕자가 왜 왕에게 준 칠지도(일본 국보)  ( 출처 = 위키백과 )
백제 왕자가 왜 왕에게 준 칠지도(일본 국보) ( 출처 = 위키백과 )

백제는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현재 일본 국보인 칠지도(七支刀)가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 지를 위해 백련강(百鍊鋼)으로 칠지도와 함께 철정 40개를 만들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련강은 괴련철을 목탄로에 넣어 가열시켜 침탄이 일어나도록 함과 동시에 철편을 두드리며 접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제조한 강철과 유사한 특성의 단철이다.

울산 달천광산 발굴 모습 ( 출처 = 중앙국립박물관 )
울산 달천광산 발굴 모습 ( 출처 = 중앙국립박물관 )

신라는 울산의 달천광산 철광석과 경주 북천에서 생산되는 사철을 사용해 활발하게 철을 생산했다. 울산 달천 야적지의 경우 제련로, 정련로, 주물로 및 단조로가 모여서 조성됐는데 대규모 일관 제철공장을 운영한 것을 의미한다. 달천 철광산은 노천광산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철광산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채광이 이뤄졌으며 남한에서 가장 크다. 달천광에는 소량의 비소가 들어 있으며 생산된 괴련철이나 선철에도 포함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주요 야철지에서 발견되는 철 유물에도 비소가 발견된다. 달천 철광이 일본으로 수출되었음을 입증하는 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제철산업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철유전이라는 국영공장을 운영하고 철 생산을 국가가 통제했다. 서기 573년 신라 3보(三寶) 중 하나인 장존육상이라는 대형 석가삼존 불상을 제조해 황룡사에 조성했다. 무게가 3만5천근(21톤)으로 철이 1만2천근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 최대 최대 철 주조품으로 약 25톤의 용탕이 필요했고 주변에 대단위 야철 단지가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신라시대 철제여래좌상(서산 보원사지)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통일신라시대 철제여래좌상(서산 보원사지)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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