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현의 인문산책] 600년 음주문화, 술꾼이 왕조를 이기다②
[박기현의 인문산책] 600년 음주문화, 술꾼이 왕조를 이기다②
  • 박기현
  • 승인 2019.10.25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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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주범으로 몰린 관료들

음주는 조선의 공적이었다.

관료들의 음주는 특히 문제가 되었다.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강변에 나가 기생과 소리꾼을 불러놓고 요란한 잔치를 벌이는가 하면 주태백이 되어 추태를 부리고 밀실에서 정쟁을일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역대 임금들의 교지를 보면 술을 경계하는 정도가 아니라 술을 망국의 범인으로 여긴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수 있다. 조선 태조는 건국 4년 째 금주가 지켜지지 않자 모진 결심을 하고 광주 목사 최식을 파면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세종은 재위 15년에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절주하는 것을 민망히 여긴 신하들이 음주를 권하자 스스로 교지를 내려 말하기를 “대체 술로 화가 막심하게 큰 것은 어찌 특별히 미곡을 소비하고 재정만 낭비할 뿐이겠는가.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난잡하게 하고 밖으로는 위의를 상실하며 혹은 부모의 양로를 폐지하기도 하며 혹은 남녀의 구별을 문란케 하여 크게는 국가를 상실하고 적게는 개인의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이니 살고 멸망하는 것이 그 까닭인지라.”라며 극도의 금주를 스스로 지켰다.

세종은 우리 역사를 들추면서 “옛날 신라는 포석정에서 패망했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멸망했는데 이는 술로 연유되지 않음이 없었고, 고려 말년에는 상하의 장수가 서로 제마음대로 술에 빠져 마침내 나라가 멸망됨에 이르렀다”면서 “이 또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함을 역설했다.

세조는 사찰을 통해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가 인성군 홍윤성과 음주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진지를 참형에 처할 것을 명령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숙종은 “나라를 멸망케 하고 일신을 망치는 화근은 본래 탐내는 한 가지 이치뿐만이 아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술에 빠지는 데 기인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서 “근래의 대·소신들은 열성(列聖)께서 내리신 유훈을 체득하지 않고 오직 술마시는 것만 숭상하고 술주정으로 소일하여 위로는 중대한 국사를 내버려두고 아래로는 부형의 슬픈 근심을 물려주어 심지어는 패가 망신하고도 태연 자약하여 반성할 줄을 모르고 고치기 어려운 폐습으로 되어버려 급기야엔 이처럼 극도에 달하였다”고 개탄했다.

종묘조서연관사연도 (고려대 박물관 소장)-조선시대 회식의 모습
종묘조서연관사연도 (고려대 박물관 소장)-조선시대 회식의 모습

영조는 가장 금주에 엄격한 임금이었다.

당시에 조선 관리들의 풍습 가운데 술을 좋아하여 많이 담그는 집들은 쌀을 30-50석이나 담그고 이를 삼해주(三亥酒)라 해서 반드시 정월달에 술을 담그곤 했다. 이는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될 낭비요 불만 불평의 근원지였다.

영조는 급기야 재위 35년에 음주실태를 감찰하는 음주 암행어사를 내보낸다. 한강 이북의 금주령 이행상황을 염탐하려던 임준은 마침 도성 순라군들의 음주 실태를 적발하게 되고 영조 는 이에 책임자인 어영대장 정여직을 파직하고 병조 판서를 보내 노량진에 가서 중군(中軍)에게 곤장 열 대를 때 리게 하고 파면했으며 군졸을 지휘하던 패장(牌將)을 곤장으로 다스린 후 계급을 낮춰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이런 과격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술버릇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술꾼이 왕조를 이긴 셈이니 조선의 망국은 이미 오랜 세월 준비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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