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정의가 무너진 사회는 죽은 사회다. 저성장, 양극화, 이념‧젠더 갈등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이 가스처럼 내면에 쌓이면서 분노와 대립으로 이어져 정의에 목말라 있다.
각자가 가진 ‘정의의 칼날’로 타인을 재단하고 헐뜯는다. 정의를 앞세워 자신만 옳다고 믿음과 시기로 서로를 공격하는 소위 ‘정의감 중독사회’가 되었다. 정의의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인데, 과연 우리사회에 정의가 존재할 수 있는 풍토인지 의구심마저 든다.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고 동등하게 대우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의의 질적 내용이 다양하고, 이상적인 정의를 가로막는 장벽과 돌부리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스 전쟁’에서 정의를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아테네가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작은 섬 국가 멜로스로 동맹사절단을 보냈다. 멜로스인이 거절하자 노골적인 표현을 한다. “정의는 세력이 동등한 국가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강자와 약자의 사이에서는 순전히 힘의 논리에 따른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강자는 할 수 있음을 하고 약자는 견뎌야 하는 것을 견딘다.” 세상은 약육강식으로 결국 멜로스인들은 속국이 되어 몰락되었다.
오늘날 샌델이 말하는 정의를 소환해 본다.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제시한 ‘철로를 이탈한 전차’는 대표적인 정의의 딜레마이다. 물론 마이클 샌델은 사례를 통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정치철학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정의의 정당성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당신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전차의 기관사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났다. 이대로는 철로 위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다섯 명을 덮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첫 번째 상황. 전차의 경로를 비상철로로 바꾸면 철로 위에 있는 행인 한 명만 죽는다. 선로를 변경할 것인가? 두 번째 상황. 당신은 다리 위에서 전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다. 마침 당신 옆에는 덩치 큰 행인이 서 있었다. 행인을 밀어서 기차에 부딪히게 만들면 인부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다. 행인을 밀어 인부 다섯 명을 구해야 하는가?
두 상황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첫 번째 상황에서는 선로를 변경하겠다고 답한다. 두 번째 상황에서는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답했다. 샌델은 여기서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추론해보면 두 번째 상황에서 행인을 밀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고귀한 목적이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행인을 밀어 죽게 할 권리가 없다. 생명이란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반면 첫 번째 상황에서 선로를 바꿔 1명은 비록 억울하게 죽지만 그 대신 5명을 살린다는 대의명분에 수긍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가 합리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 측면에서 볼 때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생명을 단순히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할 수 없지 않은가?
영국선 미뇨넷호가 희망봉 앞바다에서 난파되었다. 표류 18일 만에 음식이 떨어져 선원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었지만, 체력이 약한 소년 선원을 죽여 그 고기를 먹고 살아남아 표류 24일 만에 독일 선박에 의해 구조되었다. 귀국 후 이 사건은 비난과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물론 재판에서도 모살(謀殺)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특사로 6개월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범이지만 1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이 낯설지 않다.
지혜를 사랑하고 정의의 상징인 소크라테스도 노예제도를 인정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저론’, ‘기울어진 운동장’, ‘걷어차인 사다리’ 등 비난과 지식은 넘쳐나는,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시대이다. 정의가 단순히 교양이나 지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가 이론, 진리가 아닌 사람들의 양심, 무한의 헌신에 의해 실천되었으면 한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진리 없는 직관은 맹목적일 가능성이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