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슬기로운 직장생활] 당신이 코로나에 걸렸다면? '메멘토 모리'
[김진혁의 슬기로운 직장생활] 당신이 코로나에 걸렸다면? '메멘토 모리'
  • 김진혁
  • 승인 2021.12.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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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한국취업컨설턴트협회 대표  (행정학 박사)
김진혁 한국취업컨설턴트협회 대표 (행정학 박사)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며칠 전, 보건소에서 보낸 “당신과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이 코로나에 감염되었으니 신속히 검사 받아라.”는 메시지에 뜨악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죄인이라도 되는 양 사무실을 빠져나와 보건소로 향했다.

처음 받은 PCR 검사에 걱정 반 근심 반. 접수부터 통보까지 스마트 폰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놀랐다. 코 쑤시는 것도 긴장해서인지 별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갈등과 고통은 집에 도착해서부터 생겼다. 검사받기 이틀 전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했었다. 딸자식이 하는 말 “아빠가 음성 판정 나오기까지 등교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손자 하는 말이 걸작으로 “할아버지, 이제 나이 8살인데 할아버지 때문에 죽으면 너무 억울합니다.”라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애교가 섞인 말이겠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졸지에 죄인이 된 느낌. 하소연도 소용없지만,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원망스러운 게 아닌가? “아뿔싸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에서 어떻게 벗어나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어느 날 석가가 전도하러 갈 때 기생을 찾아 나서는 젊은이를 만났다. 석가는 “그대들은 여자를 찾는 것과 자신을 찾는 것 무엇이 중요한가?” 그때 젊은이는 정신을 차려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살면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은 내 안에 있다. 남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비난해야 할 사유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생각은 강물처럼 흐르고, 동일 사안도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것이 세상살이다.

나라 전체가 요수소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주요 글로벌 공급망을 언급하면서 인용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못이 없으면 편자가 사라지고, 편자가 없어지면 말을 잃고 결국 왕국이 사라진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제국의 붕괴는 시간적 틀에서 순차적 붕괴가 아니라 야밤에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온다.” 단순한 차이가 국가나 개인의 삶에 큰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야 한다.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에 있는 직선이 아닌 예측불허의 곡선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말이다. “나를 살리는 법을 찾는 하루를 만들라. 그것이 남을 비난하는 데 쓰는 시간보다 더욱 값어치가 있다.”

여전히 삶은 신비롭고 예측 불가능한 것처럼 슬픔과 고통도 한꺼번에 몰려왔다. 집안에 격리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후배가 법정 다툼으로 큰 곤경에 빠졌다고 한다. 평소 건강에 자신했던 선배의 부고 소식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는 라틴어 경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니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고 마지막일 수 있다. 그래서 운명을 사랑하고 순간순간을 즐겨야 한다. 삶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 감염 걱정과 노화로 인한 통증과 불평에 싸여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오늘 숨 쉬는 것이 선물이자 축복이 아닐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너무 쉽게 여겼던 것이 미안할 뿐이다.

“내가 코로나 걸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해결안도 의미 없다. 걱정을 품은 자, 브레이크를 밟고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운전자와 같다는 말이 있다. 무거운 짐으로 인해 선박이 가라앉는 것과 유사하다.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 평생을 보낸 조지 월튼 박사는 ‘Why Worry’(2005, 행복한 마음)에서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사소한 것이다.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이어서 월튼 박사는 ‘걱정은 습관이자 하나의 질병’이라고 간주하면서 걱정이 들어설 자리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대신 집어넣으라고 조언한다.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오 신이시여, 왜 인간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까?”

나는 3번의 PCR 검사와 음성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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