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펀드는 주로 경영진이나 지배구조에 큰 하자가 있어 기업가치가 훼손된 기업을 타깃한다. 사모펀드의 궁극적 목표인 자금회수(엑시트)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자를 바로 잡는데 성공하면 기업가치가 오르고, 그 만큼 차익을 실현할 수 있다. 땅콩회항의 한진칼이나 2000억원대 직원횡령이 발생한 오스템임플란트가 그 예다.
MBK파트너스가 공개매수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었다. 기존 사례들과 달리 경영진에 문제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장씨와 최씨가 벌이는 경영권 다툼에 장씨 편에 가세한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값은 비싸게 치르기로 했다. 고려아연은 안정적인 실적 덕에 평시에도 주가수익비율(PER)이 10배 이상으로 관리돼 왔다. MBK파트너스 공개매수가격은 PER 24배를 적용한 가격이다. 추후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구조적으로 엑시트가 쉽지 않은 딜이다. MBK파트너스는 비싸게 산 고려아연을 더 비싸게 팔아야 한다. 그런데 경영진이 바뀐다고 주가가 오를 유인은 크지 않다. 일각에선 MBK파트너스가 중국으로의 매각을 최후의 선택지로 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고려아연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아연’ 글로벌 1위다. 중국은 미국과 무역분쟁을 치르며 자원안보를 강화하고 있다.
◇ 13.6조 밸류에 공개매수, PER·PBR 포스코 상회
MBK파트너스는 이달 13일 고려아연 공개매수신고서를 제출했다. 장씨 일가가 지배하는 영풍과 함께 주당 66만원에 고려아연 보통주를 최소 144만5036주에서 최대 302만4881주를 매수하기로 했다. 발행주식수의 6.98%~14.61%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세부적으로 MBK파트너스6호 펀드가 만든 특수목적법인(SPC)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가 144만259주~301만4881주(6.96%~14.56%)를, 영풍이 4777주~1만주(0.02~0.05%)를 매수키로 했다. 공개매수는 이날부터 내달 4일까지 11영업일간 진행하기로 했다.
현재 고려아연 지분은 영풍측(장씨)이 33.13%, 고려아연측(최씨)이 33.99%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자사주(2.39%)와 국민연금(7.57%) 보유분을 제한 유통물량비중은 22.92%다. MBK파트너스와 영풍측이 공개매수에 성공할 경우 양측 합산지분율은 40.1~47.7%로 높아진다. 현재 최씨 일가로 포진한 이사회를 뒤엎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상당히 비싼 가격이다. 매수가(66만원)는 전일 종가보다 18.71% 높은 가격이다. 매수가 기준 시가총액은 13조6642억원으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까지 최근 12개월(LTM, Last Twelve Month) 순이익(5565억원) 기준 PER이 24.6배다. 국내 최대 철강기업인 포스코홀딩스보다 멀티플이 높아졌다. 포스코홀딩스는 이달 13일 종가와 LTM순이익 기준 PER이 22.6배 포인트다.
또 다른 멀티플 지표인 주가순자산비율(PBR) 역시 동종업계를 크게 웃돌게 됐다. 고려아연 PBR은 매수가와 올 상반기말 순자산(9조7590억원) 기준 1.41배다. 13일 종가 기준 포스코홀딩스 PBR은 0.5배, 철강 2위 현대제철은 0.17배에 그친다. 고려아연 PBR이 포스코홀딩스의 3배에 가깝다.
고려아연은 안정적 현금창출력으로 경영권분쟁 전에도 주요 멀티플이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돼 왔었다. 지난해 말 기준 PER은 17.3배로 포스코홀딩스(33.3배)보다는 낮았지만 현대제철(12.8배)은 상회했다. 같은 기간 PBR도 1.08배로 역시 포스코홀딩스(0.68배)와 현대제철(0.25배)을 크게 웃돌았다.
MBK 덕에 더욱 고평가된 상황이다. 멀티플은 더 높아질 수 있다. 공개매수를 시작한 날 주가가 급등한 탓이다. 13일 종가는 66만6000원으로 공개매수가(66만원)를 6000원 웃돌았다. 고려아연측이 백기사를 동원해 방어할 것이란 기대감에 오른 것으로 풀이된다. 기존 주주들이 공개매수에 응할 유인이 약해진 상황이다.
이에 MBK파트너스가 매수가를 한 두 차례 더 올려 대응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현 매수가(66만원)를 직전과 비슷한 비율(18%)로 올리면 PER은 29배, PBR은 1.65배 수준으로 뛴다.
◇ SI ‘현대차‧한화‧LG’에 울산시도 최씨경영 지지
현 경영진(최씨)을 이해관계자들이 하나 같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해관계자는 고려아연과 사업적 교류를 하고 있는 전략적투자자(SI)와 지역사회, 임직원 등이다. 경영진 교체로 기업가치 상승을 보장할 수 없다. 기존 행동주의펀드 타깃과는 다르다.
현 최씨일각측으로 분류되는 지분율(33.99%)에는 SI 지분이 포함돼 있다. 최씨 일가 구성원이 보유한 직접 지분은 약 12%에 그친다. 한화(7.75%)와 현대차그룹(5.05%), LG화학(1.89%), 모간스탠리(0.48%), 한국투자증권(0.77%0, 한국타이어(0.75%) 등이 최씨를 지지하고 있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가 위치한 울산시도 목소리를 냈다. 16일 김두겸 울산시장이 성명을 내 “지역 향토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인 고려아연에 대한 사모펀드의 약탈적 인수합병 시도를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최씨 일가가 3대에 걸쳐 경영능력을 입증해온 것과 무관치 않다. 영풍그룹은 황해도 출신 동향인 고 장병희 회장과 최기호 회장이 1947년 설립한 영풍기업사가 모태다. 지금의 지주사격 회사인 영풍이 영풍기업사의 바뀐 사명이다.
두 회장은 아연괴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상황에 착안, 1970년 석포제련소를 만들어 비철금속 제련업에 진출했다. 1974년엔 자회사 고려아연을 설립해 제2 거점인 온산제련소를 만들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사업도 나눠서 했다. 장씨가 영풍(석포제련소)을, 최씨가 자회사 고려아연(온산제련소)을 맡았다.
고려아연은 올해가 설립 50년차로 아연 세계 1위사 지위에 올라있다. 올 상반기에 매출 5조4335억원에 영업이익 4532억원을 기록했다. 영풍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영풍은 연결기준으로 올 상반기 매출 1조4934억원에 영업손실 431억원을 기록하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석포제련소가 조업중지 되는 등 타격을 입은 여파다.
시가총액도 시장지위 격차를 설명한다. 고려아연은 공개매수전인 12일 기준으로도 시가총액이 11조5110억원으로 같은 날 영풍(5470억원)의 21배에 달하고 있다.
현재 이사회는 고 최기호 회장의 장손주이자 창업3세인 최윤범 회장이 의장을 맡아 이끌고 있다. △신재생에너지(그린수소)와 △자원순환(페배터리) △2차전지소재 등 미래사업을 육성하는 '트로이카 드라이브'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 비싼 몸값 중국은 감수할 듯
결과적으로 MBK파트너스는 추후 엑시트를 도모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사모펀드는 통상 펀드설정기간이 3~5년이다. 출자자들이 희망하는 기대수익률은 100% 내외다. 비싸게 샀는데 더 비싼 값에 팔아야한다.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이 스스로 비싼 가격임을 우회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공개매수 시작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려아연측이 백기사를 동원할 것이라는 관측에 대해 “간판 대기업이 몇천억원을 쓰려면 25~30% 손해를 볼 각오를 해야 한다”며 “어느 이사회에서 동의해주겠나, 희망사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영풍이 MBK파트너스가 엑시트를 추진할 경우 보유지분을 우선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자금력이 약하다. 올 상반기말 별도기준 현금성자산이 1690억원에 그치는데다 실적도 좋지 않다. 애초 돈이 없어 MBK파트너스를 끌어들였다.
이에 MBK파트너스가 국내에서 원매자를 구하지 못하면 중국으로 눈을 돌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중국투자에 상당한 공을 쏟아 왔고, 그만큼 현지 네트워크가 탄탄하다고 평가받는다.
MBK파트너스는 2021년 중국 테마파크 하이창오션파크 지분을 10억1000만달러(약 1조3000억원)에 인수한 바 있다. 중국 렌터카 업체인 선저우주처(Car)도 약 1조2900억원, 이하이(eHi)오토서비스에도 4500억원을 투자한 바 있다.
작년 말에는 중국 반도체 및 칩셋 제조사 칭화유니그룹의 세컨더리 채권을 1250만달러(약 160억원)에 사기도 했다. 이밖에 △중국의 대학원 입시학원 체인 웬두에듀케이셔널그룹 △중국 스파(SPA·제조 및 유통 일괄형) 브랜드인 시얀리 등을 인수했다.
한 철강업계 애널리스트는 “고려아연은 철강업계의 포스코처럼 세계 최정상급 비철제련회사로 기술력에서 세계 상위급”이라며 “TSL공법 등 기술개발로 타국 제련사들이 버리는 광물찌꺼기를 끝까지 걸러내 금과 은, 인듐 등 귀금속과 희귀금속도 추출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려아연은 향후 누가 경영하면서 주주가치를 향상시킬까를 고민해 보면 현재의 경영체제가 나아 보인다”며 “사모펀드와 영풍이 이 같은 기술중심 경영전략을 최씨 집안을 대신해 잘해낼 수 있을지 질문을 던져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MBK파트너스가 이번 M&A에 성공한다면 향후 팔고 떠날 때 누가 경영을 맡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