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가장 큰 도리다.” — 정약용(1762~1836)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실학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개혁가이자 실천가였으며, 청렴과 절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역경 속에서도 학문과 인격을 완성했다. 학문을 위해 공부하지 않았고, 권력을 위해 지식을 쌓지도 않으면서 역경을 성찰의 시간으로 바꿨다. 그가 공부한 이유는 “사람이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그래서 그의 학문은 언제나 백성의 삶, 정의로운 사회, 인간다운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27세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그의 사상은 이이·이익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새 학문으로 집대성하였고,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을 경세(經世)·목민(牧民) 실학사상으로 결합시켰다. 실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형식적인 성리학 논쟁에 빠져 있어, 백성의 삶은 점점 어려워졌다. 정약용은 이런 현실을 보며 학문은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행정과 제도를 설명한 책을 썼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관리가 어떻게 백성을 돌봐야 하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사상의 기저는 “학문은 백성을 살리는 데 있다.” 이 말은 큰 울림을 준다. 지식과 능력은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할 때 더 큰 가치를 갖는다.
정약용은 유배라는 혹독한 역경 속에서도 학문을 포기하지 않았다.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모임을 가졌다는 이유로 무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간을 인생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로 만들어, 약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모습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과도 닮았다.
다산은 평생 정직과 청렴을 강조했다. 벼슬이나 권력보다 인격을 더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그는 “사람이 귀한 것은 지위가 아니라 덕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유배 중에도 제자들에게 “관리의 첫째 덕목은 청렴, 둘째도 청렴, 셋째도 청렴”이라 가르쳤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가정교육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자식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성실한 삶,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함은 세상의 큰 재산이다.” 가난해도 부지런하면 살아갈 길이 열리지만, 게으르면 어떤 재능도 의미가 없다고 가르쳤다. 둘째, 검소한 생활, 자식들에게 사치를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집안이 망하는 것은 대부분 사치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많은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은 소득이 부족하기보다는 과소비가 문제다. 셋째, 독서와 공부를 통해 인간의 정신이 성장한다고 믿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하는 태도다. 정약용은 역경을 학문과 성찰의 시간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다산의 교훈을 찾아본다. 첫째, 학문과 지식은 현실을 위해 쓰여야 한다. 둘째, 역경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학교가 될 수 있다. 셋째, 자식 교육의 핵심은 성실과 인격이다. 넷째,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됨이다.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자신의 양식과 옷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관직은 백성을 위해 잠시 빌려 쓰는 자리일 뿐, 내 소유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래서 관직을 내려놓을 때도 아쉬움이나 미련 없이, 깨끗하게 떠날 수 있었다. 비록 미래가 불투명해도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유행이 아닌 기본을 지킬 이유이다.
“결과를 고민할 시간에 먼저 움직여라, 모든 위대함은 미약한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다산 정약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