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부당해도, 신은 공정하다.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 롱펠로우(미국 시인이자 소설가)
보통 정의란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로 이해한다.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행복, 자유, 미덕 등을 든다. 그중 미덕을 정의의 으뜸이라고도 하는데,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고, 억울한 사람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정의의 뒷받침이 없는 용기는 무용지물이 아닌가?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로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은 “법이 불의하다고 해서 함부로 어길 수는 없다”는 태도다.
인류의 역사와 문학, 종교의 깊은 층위에서는 법의 정의가 다른 차원의 선택으로 등장한다. 남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정의를 넘어, 사랑과 연민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침묵으로 감싼 자비 — 하쿠인 에카쿠의 이야기
에도 시대 일본의 선승 하쿠인은 어느 날 마을에서 큰 비난을 받게 된다. 한 젊은 여인이 아이를 낳으며 ‘아버지는 하쿠인’이라고 지목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했고, 그는 하루아침에 타락한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하쿠인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만 했다. ‘그런가.’
그는 아이를 받아들여 직접 키웠다. 조롱과 비난 속에서도 침묵으로 감당했다. 시간이 흐른 뒤, 여인은 결국 진실을 고백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하쿠인을 찾아와 사과했다. 그때도 그는 말했다. ‘그런가.’ 그는 명예를 지키는 대신, 한 생명과 한 여인의 삶을 지켜냈다.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누군가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낙인의 무게를 안은 사람 — 헤스터 프린
나서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 속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간통의 죄로 가슴에 ‘A’라는 낙인을 달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상대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 침묵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사회적 수치와 고립을 감내하면서도, 한 인간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낙인의 ‘A’는 ‘Adultery(간통)’가 아니라 ‘Able(능력 있는)’ 혹은 ‘Angel(천사)’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타인의 죄를 짊어진 그녀의 선택이, 결국 그녀를 더 높은 인간으로 만들었다.
이 두 이야기는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했는가?”
합리적으로 보면, 그들은 손해를 본 사람들이다. 억울한 비난을 받았고, 자신의 명예를 희생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계산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나온다. 자신을 지키는 것보다 타인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 진실을 드러내는 것보다 사랑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확신, 자비를 선택하는 용기, 도덕을 넘는 영성(Spirituality)을 보인 것이다.
종교는 종종 교리와 형식으로 평가된다.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열심히 행하는가? 참 종교인은 남의 죄를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타인의 약함을 자신의 책임처럼 받아들인다. 정의를 말하기 전에 자비를 실천한다. 형식을 지키는 사람은 많지만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은 드물다. 이 점에서 보면, 참 종교인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사랑을 대신 짊어지는 힘이 바로 정의가 되며 공정함이다. 각자가 자기 몫의 책임을 지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대신 견딜 때 그 속에서 관계와 공동체가 유지된다. 하쿠인의 침묵, 헤스터의 낙인.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더 깊은 승리였다. 진정한 정의는 말이 아니라 선택에서 드러난다. 그 선택은 언제나 묻는다.
“당신은 타인의 짐을 어디까지 함께 질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