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강산업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인구감소와 건설경기 침체로 국내 철강 수요는 구조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자동차·조선·기계 등 주요 수요산업의 철강 소비 구조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기에 AX·DX 전환과 탄소중립이라는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까지 겹쳤다.
대외환경도 녹록지 않다. 미·중 패권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지역의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고금리와 원자재·에너지·물류비 부담도 여전하다. 무엇보다 미국과 EU를 비롯한 주요 철강 수입국들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무역규제를 강화하면서 과거와 같은 자유무역 환경을 기대하기도 어려워졌다.
철강산업 내부의 문제도 적지 않다. 메이커와 유통업체, 철강사와 수요업체 사이에는 가격과 공급을 둘러싼 갈등과 불신이 반복되고 있다. 시장이 어려울수록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보다 각자의 생존을 우선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최근 국내 주요 철강사들의 실적이 다소 개선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철강산업의 본격적인 회복 신호로 받아들이기에는 조심스럽다. 가격 인상과 수입 감소에 따른 반사효과가 상당 부분 작용했기 때문이다. 정작 국내 철강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다.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경기 불황에서 오는 일시적 어려움이 아니라 세계 경제와 산업의 구조 자체가 바뀌는 과정에서 오는 구조적 어려움이라고 판단된다. 쉽게 말해서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고, 중국의 공급과잉에 따른 밀어내기 수출도 수시로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할 것이다. 무엇보다 인구감소와 산업구조 변화를 감안할 때 국내 철강 수요가 과거 수준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 철강산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많이 만드는 산업’에서 ‘가치 있게 만드는 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과거 한국 철강산업의 성장 공식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생산량을 늘려 원가를 낮추고, 남는 제품은 수출을 하면 됐다. 그러나 이제 이 공식은 더이상 작동하기 어렵다.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생산능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면 결국 가격 경쟁이 심해진다. 가격이 떨어지고 수익성이 악화되면 다시 수출을 늘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각국의 무역규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것이 지금 세계 철강산업이 빠져 있는 악순환이다. 중국만 탓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부터 살펴봐야 한다.
범용 철강재의 생산능력은 시장 규모에 맞게 조정하고, 자동차·조선·방산·원전·전력망·반도체·AI 데이터센터 등 미래 성장산업이 요구하는 고급·고기능 철강재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철강 수요가 증가하는 산업을 찾아 그 산업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공부도 필요하다. 가령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난다고 해서 단순히 철강 판매량이 얼마나 증가할지를 계산할 것이 아니라, 데이터센터에 어떤 강재가 사용되고 어떤 품질과 성능이 요구되는지 파악해야 한다. 전력망 확대 역시 마찬가지다. 반도체 공장, 전기차, 로봇, 방산 등 새로운 산업이 요구하는 철강의 특성을 먼저 이해하고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
탄소중립도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탄소중립은 철강업계에 상당한 비용 부담을 가져오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앞으로 고객들은 단순히 ‘한국산 철강’이라는 이유만으로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 것이다. 탄소 배출량이 낮고 품질이 우수한 철강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고객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새로운 제품과 시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해외시장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보호무역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범용재를 해외로 계속 밀어내는 방식은 중국을 비난하면서 중국을 닮아가는 꼴이다. 다행히 우리는 건설과 조선, 방산, 가전, 자동차, 기계 등 철강 다소비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해외 시장 공략과 개발은 철강업계보다는 이들 수요업체와 종합상사가 더 잘 안다. 이들과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 있다. 이들과 함께 제품을 개발하고, 필요한 경우 현지 생산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수출전략을 재편해야 한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철강산업 내부의 신뢰 회복이다. 메이커와 유통, 유통과 수요업체가 서로를 경쟁자로만 바라본다면 산업 전체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격과 재고, 수요에 대한 정보가 보다 투명하게 공유되고 장기 계약과 공동 개발을 통해 위험과 이익을 함께 나누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정부 지원 방향은 과거의 생산능력을 유지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설비 전환과 고부가가치화, 탄소중립 기술, 인력 재교육, 해외시장 개척 등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한국 철강산업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수요 감소와 중국의 공급과잉, 보호무역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과거의 성장방식을 지키려 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꿀 것인가? 당연히 후자다. 앞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은 몇 톤을 생산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철강 1톤에서 얼마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생산량이 줄어드는 것을 무조건 위기로만 볼 필요는 없다. 범용재 생산을 줄이고 고부가 제품을 늘려 전체 생산량은 감소하더라도 기업의 수익성과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진다면 그것 역시 성장이다. 어쩌면 한국 철강산업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성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정의를 바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많이 만드는 산업에서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산업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다음 20년은 바로 이 전환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