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태만상] 창업정신의 부활
[철태만상] 창업정신의 부활
  • 김종대
  • 승인 2020.02.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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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산업은 오랜 세월 이전부터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표토르 황제<사진>는 유럽의 조선소에서 기술을 배워 해운산업을 성장시키려 했다. 13세기부터 2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아온 제정 러시아는 그 잔재를 털어버리고 유럽과 같은 선진국이 되고 싶었다.

표토르 1세 황제

1697년, 러시아의 황제 표토르 1세는 25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한다. 황제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동인도 조선소에서 선박건조 기술을 배웠다. 지금이야 산업스파이로 오해 받을 만한 일이지만 당시의 덴마크와 네덜란드 등의 국가에서는 황제가 직접 기술을 배우겠다고 하자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한국은 이보다 약 100년 이후에서야 해운산업과 조선산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778년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제가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수차례 드나들면서 청나라 선박의 규모와 활발한 대외 교역을 목격하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백대의 수레가 싣는 중량이 하나의 배를 당하지 못하고, 육지에서 천리 길을 다니는 것도 수로로 만리를 가는 배를 따를 수 없다”

박제가는 청나라 견문록 ‘북학의’에 이렇게 썼다. 선박과 상선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차(車)와 성(城), 도로, 교량, 철 등 보고 들은 것들을 모두 상세히 기록했다. 더하여 조정을 향해 중국과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청을 수차례 올렸고, 다산 정약용도 임금(정조)에게 박제가와 같은 주청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배들은 그 제작이 너무 둔하고 무겁기 때문에 풍륜을 달지 않고서는 진행속도를 빨리 할 수 없습니다. 또 나라 사이에 불의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바, 조선법(造船法)에 대해서는 반드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박제가와 정약용의 국가 선진화 주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약 100년이 지나서야 박규수에 의해 철선을 직접 만들려는 시도가 실제로 추진됐다.

1866년 7월11일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대원군의 윤허를 받아 신미양요 때 침몰한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를 건져 올렸다. 셔먼호의 자재를 기초로 하여 조선 최초의 철선 제작에 나섰던 것이다.

박규수는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그가 할아버지의 열하일기를 탐독했으니 개화에 앞장 선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청나라에서 반년을 살면서 서구 열강의 위협을 충분히 파악 할 수 있었으니, 그의 머리 속에는 서구의 철선 몇 척만으로도 조선은 결단 날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당시의 조선은 철강산업이 매우 일천했고, 철선을 작동시키는 에너지원과. 설비원리를 기술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인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철선 제작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박규수의 실패는 대원군의 실패였다. 서양을 배우기 위해 그들의 산업현장에 들어가 직접 새로운 문물을 배웠던 제정 러시아 표도르 황제의 선택을 박제가가 알고 있었더라면 조선선업의 기술수준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5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의 조선산업은 세계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백지 수준이었던 조선건조능력이 이렇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창업자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산업 부활의 불쏘시개는 ‘창업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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