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영국 ‘뇌물방지 실패 죄’
[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영국 ‘뇌물방지 실패 죄’
  • 장대현
  • 승인 2020.09.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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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현 컴플라이언스아카데미 대표
장대현 컴플라이언스아카데미 대표

뇌물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초 뇌물 역사의 신기원(新紀元)을 이루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세계적인 항공우주 회사 에어버스(Airbus SE) 뇌물 사건이다. 

올해 미국 법무부는 에어버스가 약 39억 불의 글로벌 페널티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우리 돈으로 거의 5조 원이다.

에어버스는 해외 뇌물 혐의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영국 세 나라에 각각 벌금을 내기로 합의했다. 에어버스가 낼 벌금은 해외 뇌물 역사상 최대 규모다.

이 사건은 내부고발로 세상에 알려졌다.

내부고발자는 에어버스 영국 자회사에 일했던 직원이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수사는 프랑스, 미국으로 확대됐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2017. 1월 합동조사팀을 꾸리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제상거래 뇌물 사건에서 사법공조가 활성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사건은 영국 ‘뇌물방지법(Bribery Act)’이 제정된 이후 가장 큰 집행으로도 기록됐다.

사건을 담당한 영국 중대비리수사청(SFO)은 에어버스와 기소유예 합의서(DPA)를 체결했다. DPA는 기업이 벌금을 내는 등 일정한 조건을 따르면 검찰이 기소를 유예하는 자발적인 약정이다. 이번 DPA는 영국이 제도를 도입한 이후 7번째다.

지난 10년간 영국 정부가 DPA를 통해 기업들과 합의한 벌금 총액은 15억 3천만 파운드(약 2조 3656억 원)다. 에어버스가 내기로 한 벌금은 9억9100만 유로(약 1조 3854억 원)로 전체 벌금의 59%를 차지한다. 에어버스는 DPA 체결로 기소는 유예됐지만, 공소장에는 에어버스가 뇌물 제공을 방지하지 못한 혐의가 적용됐다.

새로운 부패방지법의 제정에는 항상 부패사건이 있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 뇌물방지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뇌물방지협약에 따라 제정된 법률이다. 영국은 이전까지 부패방지법과 공공기관에 대한 부패관행법을 근간으로 뇌물을 규제했다.

하지만 해외뇌물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OECD는 BAE SYSTEMS의 뇌물 사건에 대한 영국 정부의 미흡한 대응을 지적하며, 해외뇌물에 관한 법률 제정을 촉구했다. 세계 3대 방위사업체인 BAE SYSTEMS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무기를 팔기 위해 10년 넘게 약 10억 파운드(약 1조 5,486억 원)가 넘는 뇌물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영국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결국, 영국은 OECD 권고를 받아들여 2010년 뇌물방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보다 33년이나 늦게 탄생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센’ 부패방지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적용 범위도 넓지만, 미국 FCPA와 달리 벌금 상한액이 없다. 천문학적 벌금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 법은 제7조에서 ‘뇌물방지실패죄’라는 독특한 기업 범죄를 신설했다. 부패방지법 차원에서 볼 때 매우 특이한 조항이다. 이 법은 기업이 뇌물제공을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절차(adequate procedure)’를 갖추고 있는지를 처벌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고려한다.

만약 기업이나 종업원 등이 사업상 이익을 위해 뇌물을 제공한 경우 해당 기업이 뇌물제공 방지를 위한 적절한 절차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하지만 적절한 절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 처벌받지 않는다.

그럼 어디까지가 ‘적절한(adequate)’ 것일까? 적절한지 여부는 해당 조직의 사업 특징이나 규모, 복잡성 등에 따라 달라진다. 적절한 절차에 관해서는 영국 법무부가 별도 이행지침을 제시했다. 기업이 마련하는 적절한 절차에는 6가지 원칙(the six principles)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영국 정부 입장이다.

이 원칙에는 1) 비례의 원칙, 2) 경영진의 반부패 의지 표명, 3) 위험평가, 4) 상당한 주의, 5) 의사소통, 6) 감독과 검토가 있다. 이러한 6가지 원칙은 미국 법무부가 FCPA 가이드에서 설명한 반부패 컴플라이언스 내용과 비슷하다.

영국 뇌물방지법상 ‘적절한 조치’ 항변권은 우리 법의 양벌규정상 ‘상당한 주의 감독’ 면책조항과도 매우 닮았다. 이 ‘적절한 조치’에 관한 내용은 우리 청탁금지법에도 영향을 미쳐 “기업이 상당한 주의와 감독을 게을리하지 아니한 경우 처벌을 면제한다”라는 단서 조항을 삽입하게 됐다.

긴 장마가 끝나고 코로나가 다시 돌아왔다. COVID-19의 재확산으로 언컨텍트(uncontact)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특히 기업들은 재택근무와 원격근무를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함께 일할 때보다 감독과 관리가 더욱 어려워졌다. 경기침체가 계속되면 조직 내 업무 실적에 대한 부담은 커질 것이다.

뇌물을 통해 손쉬운 방법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런 환경일수록 부패에 대한 예방이 필요하다.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부패 방지를 위한 예산과 인력을 감축해서는 안 된다.

평소 회사가 할 수 있는 모든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부패 방지는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뇌물과 부패를 통제하지 못한 나라와 집단은 반드시 망했다. 이제 뇌물방지에 실패하면 죄(罪)가 되는 세상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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