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산업을 뒤흔든 사건1] 냉연의 눈물...일신제강과 연합철강의 흥망성쇠
[철강산업을 뒤흔든 사건1] 냉연의 눈물...일신제강과 연합철강의 흥망성쇠
  • 김종대 페로타임즈 대표
  • 승인 2019.07.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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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신제강 주창균 창업자 “일본에 져서는 안된다” 야마구치大學-일본제철입사 양평동에 신생공업사 설립
- 연합철강 권철현 창업자 부산 대규모 냉연공장 건설 1974년 수출 1억불 탑 수상
- 저성장 시대 실적악순환...원자재 구매의존 단순압연 취약구조 "창업자 정신을 남겨야"

“주인은 바뀌어도 창업자 정신은 남아야 한다”

1980년대 국내 냉연메이커는 일신제강과 연합철강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냉연메이커의 첫 단추는 일신제강이 먼저 채웠다.

한국인 최초 야하다제철 입사

일신제강의 창업자는 주창균씨다. 그는 1921년 평북 삭주군에서 출생했다.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우베공업전문학교(현야마구치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제철(신일철주금)의 야하다제철소에 입사하여 기술을 익혔다. 귀국 후에는 평양공업대학 교수와 황해제철소 기사장(소장)을 지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철강 전문가이며 정통 엔지니어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주창균씨는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1952년에 동량법랑 부산공장을 인수하여 신생공업사를 설립했다. 1954년에는 서울 양평동에 국내 최초의 아연도 철판(함석) 생산 설비를 갖춘 신생산업을 설립했다. 1960년에는 일신산업(이후 일신제강으로 변경)을 설립하고, 1967년부터 전자제품 등에 쓰이는 냉연공장 세웠다.

장영자 어음사기에 휘말리다

그는 종합제철소를 건립하겠다는 꿈을 가졌으나, 1982년 장영자-이철휘 어음 사기 사건에 휘말려 흑자였던 일신제강을 부도처리하게 되었다. 일신제강은 채권단에 넘겨졌다. 주창균씨의 주변에서는 소송을 벌여 기업을 되찾으라는 제의를 했지만 거절했다.

“내가 판단을 잘 못해서 일으킨 일이므로 그냥 나둬라”

“주인이 바뀌어도 창업자의 정신은 살아 있어야 한다.”

일신제강의 창업주인 주창균 씨의 우물처럼 속 깊은 말 속에는 철강기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철강인의 향기가 묻어난다. 결국, 일신제강은 포스코 위탁 경영을 받으면서 동진제강으로 변경됐고, 제3자 인수 원칙에 의해 1985년 동부그룹으로 넘어갔다. 신생기업-일신산업-일신제강-동진제강-동부제강-동부제철이란 이름으로 애환을 겪은 오늘의 동부제철은 창업자 주창균씨의 평소 지론이었던 “일본에게 지면 안된다”는 유지를 잘 이어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재기 나선 동부제철

동부제철은 최근에 재기의 노력이 돋보인다. 수익성 제고에 팔을 걷어 붙인 것이다. 작년부터 공급과잉인 내수시장을 탈피하여 수출을 과감히 확대했다. 올해는 주력 생산품목인 아연도금강판(GI)을 판매를 줄이고 칼라강판 등의 소재로 투입량을 최대한 늘리고 있다.

오랫동안 진행했던 제3자 인수의 노력도 KG그룹에 안착한 만큼 갖가지의 전략이 새롭게 추진되는 양상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주창균 씨가 장영자 사건에 휘말리지만 않았더라면 오늘의 동부제철은 더 크게 성장 했을 것이라는 것이 철강업계 원로들의 예상이다. 일신제강의 경영에서 손을 뗀 주창균 씨는 현송교육문화재단을 운영하면서 후학의 지원에 힘쓰다가 2012년 12월29일 별세했다.

동부인천스틸(사진)은 동부제철의 핵심 사업으로 성장의 중심이 됐다. 동부제철이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이후 동부제철 인천공장은 동부인천스틸로 사명이 바뀌었다.
동부인천스틸(사진)은 동부제철의 핵심 사업인 컬라강판 생산의 핵심 기지다. 동부제철이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이후 동부제철 인천공장은 동부인천스틸로 사명이 바뀌었다.

수출1억불 탑의 영광

연합철강 역시 불운의 기업이다. 1967년 부산 감만동에 대규모의 현대적인 냉연공장을 건설했던 창업자 권철현씨도 비운의 철강인으로 분류된다. 1974년도에 국내 처음으로 삼성을제치고 수출 1억불 탑을 수상했던 연합철강의 사세는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기울고 있었다. 결국, 연합철강은 1978년 국제그룹으로 인수되면서 창업자의 역사를 단절시켰다.

연합철강은 국가 통치자에게 잘 못보여 제3자에게 기업을 인수케 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1975년도 이전부터 연합철강의 경영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부채비율은 400%였다. 한 때 1000%에 이른 적도 있었다. 당시는 오일쇼크로 수출 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였다. 정부는 수출 주도정책을 펴고 있었다. 수출 1위 기업인 연합철강이 수출을 않자 정부관계자들은 연합철강을 안 좋게 봤다.

연철->국제->동국제강 품으로

결국 1976년 법인세 추징금 15억 원을 내지 못했다. 모두 19억 원의 결손이 발생하자 주거래은행(서울신탁은행)은 연합철강을 은행관리로 넘겼다. 그리고 국제그룹으로 넘어간 연합철강은 1985년 2월21일 국제그룹의 부도로 동국제강그룹에 인수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연합철강 창업주 권철현씨는 기업을 되찾으려는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는 2003년 5월18일 심장마비로 78세의 나이에 별세 했다.

동국제강 부산공장 전경(옛 유니온스틸)
동국제강 부산공장 전경(옛 유니온스틸)

단순압연 취약구조가 문제

국내 냉연산업의 두 축을 이뤘던 일신제강과 연합철강은 창업 당시에는 경제개발이란 호재로 급성장하였지만 저성장 시기에는 경영이 급격이 저하되는 악화순환을 경험한 것이다. 원인은 원자재를 구매해야 하는 단순압연의 취약구조가 큰 문제였다.
일신제강은 동부그룹으로,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이 인수했다. 물론 곧바로 인수된 것이아니라 두 기업 무두 포스코에 위탁경영을 맡긴 뒤에 제3자에게 인수 됐다는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동부그룹은 일신제강을 인수하면서 철강업종에 새로 진출했고, 동국제강은열연부분의 전문 철강그룹에서 냉연기업까지 아우르는 모습을 갖췄다. 안타까운 두 기업의 비운의 역사는 다시 누군가에 의해 이어질 것이다. 다만, 일신제강 창업주 주창균 씨가 남긴말, “주인은 바뀌어도 창업자의 정신은살아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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