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세계는 법률전쟁 중
[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세계는 법률전쟁 중
  • 장대현
  • 승인 2020.07.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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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현 한국컴플라이언스아카데미 대표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으로 기소될 수 있을까? 정답은 “예스(Yes)”다.

외국인이 미국 FCPA 위반으로 기소된 기막힌 사연이 있다. 이 이야기는 지난 6월 국내에도 출간된 ‘미국함정’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저자는 프랑스 알스톰 자회사 CEO였던 프레데릭 피에루치다.

이 책은 그가 미국 법무부와 지난 5년간 벌인 법정투쟁을 기록했다. 알스톰(Alstom S.A.)은 1928년 설립된 중공업 회사다. 미국 GE, 독일 지멘스와 함께 세계 3대 제조업체로 불린다. 프랑스 기술력을 상징하는 초고속 열차 테제베(TGV)를 만드는 회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책 내용은 대략 이렇다. 2013년 4월 14일 피에루치는 뉴욕 JFK 공항에서 FBI 요원들에 의해 체포된다. 죄목은 미국 FCPA 위반이었다. 미국 밖인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뇌물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자기 나라 법을 적용해 프랑스 국민을 체포한 것이다.

피에루치는 문제가 된 거래 당시 중간 관리자에 불과했고, 단 한 푼의 리베이트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뇌물 공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미국 와이어트 교도소에서 힘든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미국 법무부는 알스톰에는 FCPA 위반으로 7억 7,200만 달러(약 9,302억 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알스톰에 부과된 벌금은 당시 FCPA 위반 사례로는 사상 최대금액이었다. 그리고 피에루치를 인질 삼아 알스톰을 압박해, 당시 알스톰 핵심사업이었던 에너지 사업 부문을 자국 기업인 GE에 매각하게 만든다.

이 책은 중국 화웨이(HUAWEI) 런정페이 회장이 책상에 올려놓고 읽는다는 소문으로 유명해져 2019년 중국 서점가를 휩쓸었다. 피에루치의 체포가 런정페이 회장의 딸이자 화웨이 CFO인 멍완저우가 대이란 제재법 위반 혐의로 캐나다에서 체포된 사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피에루치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은 자국법인 FCPA를 경제전쟁의 무기로 삼아 경쟁상대를 약화하고 결국에는 상대 기업을 헐값에 인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 에필로그에는 프랑스 미테랑 전(前) 대통령의 말이 나온다. 그는 자신의 전기(傳記)인 ‘마지막 미테랑’을 쓴 작가 조르주 마크 베나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건 장기적이고 아주 중요한 전쟁이며, 경제전쟁이다. 표면상으로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지만, 사실상 생사가 달린 전쟁이다.”

저자는 이러한 ‘경제전쟁’을 ‘법률전쟁’이라고 피력한다. ‘법률전쟁’은 법률체계를 이용해 상대방을 범법자로 만들어 최대한 손해를 입히고, 위협 수단을 통해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개념은 미국 육군 대령 찰스 던랩이 처음으로 제시했는데, 법률이 경제적 통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20년 동안 유럽 각국은 FCPA를 앞세운 미국의 강탈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프랑스 주요 기업들은 미국 법무부의 사냥감이 되었다. 그동안 프랑스는 미국 FCPA 사건으로 고액 벌금을 내는 기업들이 유독 많았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 검찰의 반부패 수사에 대한 미온적 태도는 비난을 받아 왔다. 이러한 비판을 전환하기 위해 프랑스는 재무부 장관 사핀(Sapin)의 주도하에 새로운 부패방지법을 준비했다.

그 결과 ‘투명성, 부패와의 전쟁 그리고 경제활동의 현대화에 관한 법’이 2016년 11월에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은 재무부 장관의 이름을 따서 ‘Sapin Ⅱ’라고 불린다. 어떻게 보면 2014년 알스톰 사건도 이 법을 제정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FCPA로 많이 시달린 프랑스가 미국 FCPA와 비슷한 법을 만든 것이다.

최근 FCPA 10대 고액벌금 순위를 보면 프랑스 기업이 여전히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에어버스(1위), 알스톰(8위), 소시에테 제네랄(9위)이 FCPA 위반으로 미국에 낸 벌금만 합쳐도 34억 4,700만 달러(약 4조 1,446억 원)가 된다. 알스톰 사건 이후에도 프랑스 기업들이 여전히 미국 법무부의 표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재무부 입장에서는 FCPA는 노다지 같은 존재다.

미국은 1977년 자국 기업이 해외에서 뇌물을 주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FCPA를 제정했다. 하지만 1998년 FCPA를 개정해 미국의 관할권 적용 범위를 확장했다. 강력한 하드 파워를 가진 미국은 반부패(Anti-Corruption)에서 역외(域外)법을 집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된 것이다.

미국은 전 세계 부패와의 전쟁에서 자신들이 맡은 세계 경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지금도 FCPA를 강력하게 집행하고 있다. 이러한 법 집행은 이미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확립된 ‘국가 주권 존중의 원칙’을 침해한다고 비난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비난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도 현실적인 대응책 마련이 절실하다. 우리나라는 이미 국제뇌물방지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제정된 지 20년이 지난 이 법의 집행 실적은 저조하다.

국내에서 이 법의 집행이 저조한 이유는 해외에서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을 제공한 국내 기업을 처벌하게 되면 국내 기업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세계는 법률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법은 여전히 잠자고 있다.

이제 우리 정부가 나서 뇌물공여 기업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미국 FCPA의 국내적 적용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삼성중공업과 SK건설이 FCPA 위반으로 미국 법무부와 합의한 벌금만 해도 1억 4,300만 달러(약 1,724억 원)다. 이왕이면 벌금을 내더라도 한국 정부에 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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