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태 회장 20주기] ‘와이즈 맨’의 경영철학을 다시 읽는 이유
[장상태 회장 20주기] ‘와이즈 맨’의 경영철학을 다시 읽는 이유
  • 김종대
  • 승인 2020.04.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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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정한 와이즈 맨(Wise Man)이었다.”

락시미 미탈’회장이 동국제강 고 장상태 회장을 두고 한 말이다. 1990년대 중반, 장상태 회장은 후판설비 구입을 위해 멀리 멕시코까지 출장을 떠났다.

비싼 가격을 제시한 ‘락시미 미탈’과의 끌고 당기는 비즈니스는 쉽지 않았다.

협상이 진척되지 않자 장상태 회장은 한마디 했다.

“철강재는 글로벌 제품이다. 철강 설비는 필요한 사람에게 적정한 가격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야 값싸고 품질 좋은 철강재를 산출하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철강인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면서 협상 테이블을 떠났다.

서너 시간이 지난 이후에 미탈은 장상태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 물건을 팔겠다.”

이 스토리는 10년이 지난 2006년 11월, 세계철강협회 총회에서 락시미 미탈과 장세주 회장(장상태 회장 큰 아들)이 조우한 자리에서 상세히 전해졌다.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 한다

고 장상태 회장이 세계 무대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사실은 흔한 일이 아니다. ‘지혜’라는 단어는 동국제강 임직원들에게 익숙하다. 장상태 회장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임직원들에게 지혜로운 판단 강조했다.

지혜는 넓이를 갖는다. 깊이도 요구된다. 지혜의 힘은 결단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선택이다. 장상태 회장이 생각하는 지혜의 조건이다.

장상태 회장은 부산 동래고와 서울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농림부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미시간주립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귀국 후 부흥부(현 기획재정부)에서 근무하다 아버지 장경호 회장(동국제강 창업자)의 부름을 받고 동국제강(1956년)에 영입됐다. 그때 나이가 29세였다. 그는 호텔을 경영하고 싶었지만 “사내가 남의 잠자리나 깔아주는 일을 해야 하냐”는 아버지의 핀잔에 꿈을 접었다.

젊은 장상태는 동국제강을 경영하면서 선진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국내 첫 용광로의 도입과 전기로 제강기술의 도입, 그리고 고로메이커의 전유물이었던 후판공장을 포스코보다 1년 앞서 준공 시켰다. 성공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70년대에 동국제강의 후판공장은 연산 15만 톤 규모였으나 세월을 더할수록 30만 톤 체제로 증대되었다. 이 후판공장은 2후판공장과 당진의 후판공장을 연이어 설립하는 단초를 제공하면서 한국의 조선 산업을 세계 1위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장상태 회장(가운데)이 1996년 임원진과 포항 신규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장상태 회장(가운데)이 1996년 임원진과 포항 신규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동국제강

 

혁신 일으켜 위기 극복

장상태 씨는 37세에 동국제강 사장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무려 7개의 철강 기업을 운영하는 철강 전문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은행관리에 처한 한국강업과 한국철강 그리고 연합철강 등의 철강기업을 인수하여 정상화시켰다.

그는 어려운 시기가 닥치기 전에 혁신을 일으켰다. 일본을 추월해야 한다는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평지풍파를 일으켜서라도 혁신하라”는 지시를 전 사업장에 내렸다.

1994년 봄, 일명 ‘일 줄이기 캠페인’이 벌였다. 온 사업장이 요란했다. 불필요한 일을 없애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심장부였던 회장실과 기획개발부까지 근무처를 아예 인천공장으로 이전시켰다.

이 선택은 ‘모든 경쟁력은 공장으로부터 나온다.’는 현실을 전사원이 직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죽하면 관리직 사원들도 출근하자마자 “인천공장과 부산공장의 제강생산성이 얼마나 되느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포항에 주력공장을 건설하다

이때까지의 경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성장 발전시키는데 국한되었지만 1991년도부터 포항으로 주력공장을 이전하면서 그는 기관차처럼 돌진했다. 제2의 창업이라고 할 만큼 포항공장의 신설은 어려운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장상태 회장은 1997년 1조원을 투입했다. 30여만 평의 포항 철강공단 부지에 제2후판공장과 형강공장, 봉강공장을 차례로 건설했다. IMF체제로 국가경제가 초긴장 상태였을 때 부산제강소 폐쇄에 따른 부지와 설비를 매각한 대금을 투입하여 IMF의 폭풍을 비켜나갔다. 장상태 회장의 혜안이 다시한번 빛나는 순간이었다.

포항공장을 건설하면서 장상태 회장이 보여준 태도는 ‘한평생 최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철인(哲人)’으로 대변된다.

“세계 최고의 철강 기업이 되기까지 다른 사업에 한 눈 팔지 않겠다.”

“단돈 100만원만 있어도 설비에 투자 하겠다.”

“아내의 반지를 팔아서라도 첨단 설비를 갖추자”고 했던 일화는 위기 때마다 꿋꿋이 이겨내었던 송원 장상태 정신을 일깨워 준다.

시장 흐름 잘 읽는 경영자

장상태 회장은 시장의 흐름을 잘 읽었다. 그는 정보 취득을 위해 신문을 잘 활용했다.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일간철강신문과 같은 전문신문, 워싱턴포스트지와 각종 잡지에 이르기까지 한 보따리의 신문 잡지를 집으로 가져가 밤을 새워 읽었다. 신문의 행간을 통해 남다른 지식과 지혜를 얻어냈다.

그는 해외 출장길에도 전문 서적과 수많은 경영학 서적을 탐독했다. 일본 출장 시 거처하는 유자와의 임시 숙소에도 교자상을 방 한가운데 두고 100여권의 경영학 서적과 철강 관련 자료들을 섭렵해 나갔다.

이곳에서 장상태 회장은 피터 드러커 교수의 ‘21세기의 기업경영’을 담은 비디오 테입을 수 십 번 반복하여 스터디 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그룹 계열사 사장단과 과장급 이상의 임직원을 불러 들였다. 그리고 장장 11시간 동안 비디오 테입을 함께 경청했다.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전체 사원들에게 공부하도록 했다. 시험도 치뤘다. 그의 경영 스타일은 집요할 만큼 미래를 위한 몰입이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不爭의 논리

동국제강 최대의 강점은 노사화합이다. 1994년 봄 노동조합 스스로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한 것도 알고 보면 장상태 회장의 ‘부쟁’(不爭)의 논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노사관계는 한 가족 같은 관계로 맺어져야 하며 현장 근무자들이 경영실태를 이해 할 수 있도록 회사의 경영사정을 공개해야 한다.”

“부모 자식 간에도 싸움으로 해결하지 않고 대화와 화합으로 일을 결정한다.”

장상태 회장이 원하는 회사는 “동국제강을 30년 다닌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회사이니 너도 동국제강에 들어가라고 추천 할 수 있는 회사”였다.

장상태 회장은 1992년 조세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을 때 “기업이 절세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기업인의 수치”라는 말을 남겼다.

혼백이 되어도 후배를 돕겠다

동국제강의 신화를 남기고 경영이념을 정립한 철강인 송원 장상태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4월4일)로 20주기를 맞았다.

그는 세상을 하직하기 앞서 포항공장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주문했다. 기념비문에는 “항상 최첨단의 설비를 갖추라”는 말을 당부하고 있다.

“혼백이 됐을 지라도 기꺼이 달려와 후배들을 도울 것”이라는 포항제강소 건립 기념비문의 마지막 말로 장상태 회장은 동국제강의 영원한 수호신이 되었다.

4월에 동국제강 고 장상태 회장의 경영철학을 다시 꺼내는 이유는 45년 동안 철강 외길을 걸었던 경영자의 신념과 의지를 되새겨 보기 위함이다.
 

◆ 장상태 회장 약력

1927년 부산 출생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1955년 12월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경제학 석사
1956년 3월 동국제강 입사
1963년 5월 동국제강 부산제강소 기공식 (국내 최대 민간 철강 공장)
1964년 3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
1965년 2월 국내 최초 용광로 가동
1966년 10월 국내 최초 전기로 공장 준공
1971년 2월 국내 최초 후판 생산
1972년 2월 한국철강 인수
1972년 11월 한국강업(現 동국제강 인천공장) 인수
1985년 12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회장
1986년 6월 연합철강(現 동국제강 부산공장), 국제종합기계, 국제통운 인수
1991년 6월 포항 1후판공장 준공
1992년 3월 금탑산업훈장 수훈
1993년 국내 최초 직류전기로 제강기술 도입
1994년 4월 동국제강 노조 항구적 무파업 선언
1996년 11월 송원문화재단 설립
1997년 12월 포항 2후판공장, 포항 형강공장 준공
1999년 3월 포항 봉강공장 준공
2000년 4월 4일 별세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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