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EU 후퇴에도 "메가트렌드 외면은 금물"…추격자 시각 버려야
탄소중립이라는 가치가 자본과 결합하면서 메가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모든 제조업의 근간인 철강산업이 경쟁조건을 재편할 핵심 패러다임으로 탄소중립이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선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여전히 '추격자'에 머물러있는 산업구조 재편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정은미 산업연구원(KEIT) 선임연구위원은 탄소중립에 대해 꽤나 오래전부터 논의가 이어져 왔다고 운을 뗐다. 다만 2015년 파리협정 당시만 해도 ‘지구를 아름답게’라는 가치의 문제에 머물러있었다.
이후 INDC(국가 온실가스감축 자발적 기여방안)에 이어 2022년부터는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본격화됐다. 목표를 지키지 못해도 국제적인 제재가 뒤따르거나 구속력이 있는 체계는 아니다. 다만 국제적인 협약이나 약속의 성격을 띠는 만큼 한국과 같이 규범을 성실히 이행해 온 국가에게는 사실상 국가 목표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 EU의 기술적 선도와 중국의 추격, 그리고 CBAM의 탄생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각국은 관련 정책을 잇달아 내놨다. 이와 관련해 미국과 유럽이 강력히 추진하다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혔다.
정 연구위원은 “탄소중립은 그냥 탄소를 줄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회 시스템, 국가 제도 자체가 완전히 변하는 대전환이었다”며 “대표적인 경우가 철강산업이다. 기간산업인 철강의 탈탄소화를 기술개발로 풀어내려 했다”고 말했다.
ASPI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 탈탄소 관련 기술에서 우위를 갖고있던 국가로 EU가 언급된다. EU는 'Horizon Europe' 등 탄소중립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수소경제’를 핵심의제로 제시했다.
여기에는 에너지의 전면적 전환과 수소로 만든 전력, 수소로 다니는 차, 수소로 만드는 철강까지 포괄한다. 이처럼 재생에너지를 만드는 기술, 전기차·이차전지·수소환원 등 새로운 공정 혁신 기술에서 유럽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다.
다만 기술적 선도에도 불구하고 빠른 산업화와 제품화에서는 중국을 따라잡지 못했고, 고비용 구조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탄생했다.
◇ 美, 탄소중립 ‘속도조절’…공급망 둘러싼 ‘안보전쟁’으로 격상
미국의 경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파리협정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탄소중립 정책은 제조기반 부족과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로 동력을 잃은 가운데, AI라는 새로운 성장축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결과다.
다만 AI 인프라 확대에 따른 에너지 수요 급증이라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어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는 탄소중립에 대한 전면 부정이 아닌 속도 조절로 읽히는 것이 타당하다는 분석이다.
새로운 산업경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각국의 산업·통상 정책들이 속속 재편되고 있다. 탈탄소 전환을 위해 스스로 경쟁 조건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승기는 결국 중국이 잡게되자 공급망 안정성을 둘러싼 논의를 시작으로 기술안보·경제안보 개념이 격상되는 등 사실상 전쟁으로 번진 양상이다.
정 연구위원은 “철강산업의 탄소중립은 미국이 후퇴했기에, EU가 지체했기에 우리도 ‘탄소중립을 하면 안된다’ 또는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는 ‘메가트렌드’를 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WEF(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매년 글로벌 CEO와 국가지도자들이 모여 탄소중립 이행현황과 과제를 점검한다. 지난해에는 기술 수준이 충분히 성숙했음에도 자본투자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자본가들의 입장은 초기 저탄소 제품시장을 열어달라는 것이다. 탄소중립이 이제 자본의 논리와 결합하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 견고한 산업 기반과 생태계·전환의지…‘퍼스트 무버’로 포지셔닝
정 연구위원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이 가진 강점으로 견고한 제조업 기반, 전환의지, 양호한 산업 생태계를 꼽았다. 다만 AX와 GX 등 패러다임 전환은 어떤 기업이나 산업이 단독으로 완수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했다.
그는 “인공지능, 탄소중립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한다”며 “전환 과정 가운데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포지셔닝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빨리 나아갈 것인지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산업을 어떤 모습으로 바꿀 것인지에 대해 비전을 세우고 거기에 맞는 전략을 공유해야 한다”며 “기술 전환은 임계점에 섰다. 변화하는 수요구조에서 이에 대응할 생산체제는 무엇일지 고민하고 속도감있게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