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여름,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이 조 3위로 짐을 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화가 나기보다 먼저 서글펐다.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이만한 이름값을 가진 대표팀이 언제 또 있었던가.
그런데도 32강 문턱을 넘지 못했다. 더 서글픈 건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열두 해 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같은 감독,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이미 한 번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 지휘봉을 잡은 그는, 마치 복사한 듯 같은 실패를 되풀이했다. 비기기만 해도 되는 마지막 경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선발 명단을 내밀었고, 경기가 끝난 뒤에는 본인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알면서도 왜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가.
사람은 원래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이런 인간의 모습을 두고 ‘강박적 반복’이라는 말을 썼다. 강박적 반복은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현상으로 과거 해결되지 않은 문제나 그 심리적 상처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
과거에 실패한 일을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번 축구도 그런 경우인지 모른다. 아픈 걸 알면서도 그 아픔을 다시 찾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이다.
또 사람의 뇌는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 기존의 익숙한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되지도 않는 습관을 붙들고 있는 것도 결국 뇌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인지적 구두쇠’라 부른다. 새로운 길을 찾는 일은 뇌에 여간 힘든 노동이 아니어서, 우리는 늘 가던 길로 다시 발을 뗀다.
주식이 떨어지면 손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까운 마음에 물을 타고, 나가지도 않는 헬스장 회원권을 해지 못 하고 매달 돈을 흘려보내는 것도 같은 이치다. 아는 것과 고치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강이 흐른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면 실패의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운이 나빴다”, “상황이 그랬다”며 바깥으로 탓을 돌리는 사람은 진짜 원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으니 고칠 수도 없다. 다음에도 같은 자리에서 또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조직으로 가면 이 관성이 몇 배로 커진다는 데 있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위기 경직성’이라 부른다. 위기가 닥치면 조직은 오히려 더 움츠러들어 규칙에 매달리고 권한을 좁힌다. 시야는 터널처럼 좁아지고, 낯선 길보다 익숙한 실패의 길로 발이 먼저 움직인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사람부터 자르고 마케팅비를 줄이는 것도, 사고가 나면 근본 원인을 살피기보다 감독 라인부터 늘리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당장은 숫자가 좋아 보여도 몇 해지나 더 큰 청구서로 돌아온다.
경쟁사가 혁신적인 제품으로 치고 올라오는 위기 상황이 되면, 혁신을 고민하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잘했던 옛날 스타일을 다시 전면에 내세우자며 과거에 집착하다가 시장에서 완전히 외면받는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 축구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비판 없이 분위기에 휩쓸리는 집단 사고, 한 번 정해진 방식을 좀처럼 바꾸지 못하는 관성. 손실이 난 주식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개인처럼, 협회와 대표팀도 오래된 방식에 발목이 잡혀 있었던 건 아닐까.
과거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사회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번 참사는 감독 한 사람의 무능이라기보다, 실패에서 배우기를 거부해 온 우리 모두의 타성이 만든 결과에 가깝다. 이 관성을 끊어내지 않으면, 4년 뒤 우리는 또 이런 글을 쓰고 있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