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잃으면서도 계속 만든다. 이상한 말 같지만, 지금 한국 철근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꼭 그렇다. 공급은 넘쳐나고 가격은 바닥을 기고 있다. 업체마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값에 팔면서도 설비를 세우지 않는다. 왜인가.
“나 하나 멈춘다고 시장이 살아나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내 시장점유율만 경쟁사에 넘어간다.”
경제학자 개릿 하딘은 1968년 이것을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 불렀다. 마을 공동 목초지에 소를 기르는 농부들의 이야기다. 마을 주민들이 목초지가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 가축을 절제하고 조금씩 풀면 모두가 오래도록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해도 남들이 소를 더 끌고 오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너도나도 가축을 늘인다. 목초지가 감당할 수 있는 소의 수는 정해져 있다. 그러나 각 농부에게는 소 한 마리를 더 들이는 것이 언제나 이득이다.
목초지 황폐화의 비용은 마을 전체가 나누지만, 추가된 소의 이익은 혼자 챙기기 때문이다. 결국, 목초지는 순식간에 황폐해지고 주민들의 가축이 모두 굶어 죽는 파국을 맞이한다. 모두가 그것을 알면서도.
철근 공장이 바로 그 소다. 설비 하나를 더 돌리면 손해가 나더라도 고정비를 분산시킬 수 있다. 멈추는 것보다 적게 잃는다, 그러니 돌린다. 경쟁사도 같은 계산을 한다. 다들 돌린다. 그 결과 시장 전체가 피를 흘린다.
게임이론은 이것을 ‘죄수의 딜레마’로도 설명한다. 두 명의 용의자가 서로 다른 취조실에서 격리되어 신문을 받는다. 둘 다 침묵하면 증거 불충분으로 둘 다 가벼운 처벌만 받고 끝날 수 있다.
두 용의자를 따로 심문하면 내가 의리를 지켰는데 상대가 자백(배신)해 버리면, 나는 독박을 쓰고 상대는 석방된다. 반대로 내가 먼저 자백하면 최소한 독박은 면한다. 상대방을 믿을 수 없어 두 사람 모두 각자에게 안전한 자백을 선택한다.
결국, 서로 양보했을 때보다 훨씬 더 무거운 형량을 받는다. 철강 업체들도 협력해서 감산하면 모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상대방이 먼저 설비를 줄이면 내가 시장을 더 먹을 수 있다는 유혹이 크다. 결과는 서로를 향한 총구다.
그리고 이 시장엔 퇴출이 없다. 무너진 회사의 설비가 헐값에 팔려 다시 돌아간다. 좀비처럼. 공급 과잉의 원인이었던 설비가 합병과 인수를 거쳐 다음 라운드에도 살아남는다. 구조조정이 아니라 세탁이다.
정부는 ‘자율적 설비 감축’을 권고한다. 그러나 업체들은 서로 눈치를 본다. 네가 먼저 해. 나는 그다음에. 이 말이 반복되는 사이 시간만 간다. 자율이란 이름 아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자율은 신뢰가 있을 때 작동한다. 신뢰가 없는 자리에 자율을 가져다 놓으면 그건 방관이다.
해법은 하나다. 공유지를 관리하는 규칙이 필요하다. 하딘도, 노벨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도 같은 말을 했다. 공유지의 비극은 ‘공유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규칙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철강 시장에는 지금 공정하고 강제력 있는 규칙이 없다. 업계 전체가 동참하는 생산량 협약, 잉여 설비 폐기에 대한 보상 체계, 그리고 이를 집행할 독립적인 조정 기구가 필요하다. 구체적이고 수치화된 감축 목표 없이 자율 협약은 공허한 선언에 그친다.
아무도 먼저 내려오지 않으려는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손해를 보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게 정부가 할 일이다. 시장의 실패를 시장에게 맡기는 것은 무책임이다. 돈을 잃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공장들, 그 끝은 모두의 패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