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는 한 행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_ 쇼펜하우어
오늘날 젊은 세대는 입시와 취업, 결혼, 집 마련 등 무한경쟁의 굴레 속에서 힘들다. 풍요롭지만 불만스럽고, 행복보단 불안에 익숙하다. 혹자는 인생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따분한 일상이라는 불평도 한다.
일상은 삶의 본질이고 기본이다. 그 가치를 무시하기보다는 차별적이고 풍요롭게 자신의 것으로 채워야 한다. 살아가기보단 살아내는 것이다. 꽃피는 민주주의·종교적 관용·평화·남녀평등이라는 유토피아가 존재할까? 본래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아니다, 없다”를 뜻하는 ‘우(οὐ-)’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τόπος)’가 합쳐진 단어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자 이상향일 뿐이다. 세상은 고통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고, 행복이 있는 곳에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즉 온전히 땅, 아름다운 사람, 모두 행복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불안한 시대에 서점가에선 쇼펜하우어가 유행이란다. 다소 의외다. 독일의 염세 철학자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기 위함일까?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인간 고통의 원인을 ‘의지와 만족 사이의 불합치’에서 출발한다. 세상에 살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지만, 불만족스러운 결론으로 귀결되기에 심연에 고통을 준다.
고통은 삶의 본질이다. 인간의 근원적 동력은 맹목적인 갈망, 비합리적인 의지, 욕망에서 비롯된다. 벗어나지 못할 욕망은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간다. 무언가 부족함을 느껴 이를 얻으려는 갈망은 더 큰 갈망을 불러온다. 일시적 만족을 얻으면 곧바로 무료해 권태의 고통에 떨어진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은 인생의 무게 추다. 삶이 험한 바다로의 항해라면, 고통이 있어야 인간이란 배가 균형을 잡는다. 인간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천국에는 무료함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인간은 욕망과 결핍으로 인한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망의 추구는 밑 빠진 독에 한없이 물을 부어대는 것으로 만족하기 어려운 악순환일 뿐이다. 괴로움과 즐거움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삶이다.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면 또다시 괴로움과 마주해야 한다.
그의 행복 메시지는 단순하다. “행복은 자기 자신에 있다. 끝없는 욕망을 버려라.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라. 당당하게 살아라.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3가지 경로로 ‘소유하기’, ‘타인의 눈에 들기’, ‘존재 방식’을 이야기한다. 돈이나 재산 같은 소유나 지위 같은 ‘타인의 눈에 들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일시적이거나 공허하다. 10만 원 짜리 옷을 사면 다음에는 100만 원 짜리 옷을 사야 행복해지고, 사원이 과장으로 승진하면 더 높은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반면에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작은 일에서도 큰 행복을 느낀다.
존재 방식, 성격, 품성이 확고할 때 흔들림 없는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존재 방식은 행복의 밑거름이다. 이를 향상시키고, 욕망의 눈을 잠들게 하기 위해서는 명상과 예술, 자연과 친하기를 제시한다. 행복은 자기 자신에 있기에 대상이 아니라 자신부터 즐겨야 한다. 마음을 챙기고 미적 관조를 통해 우리 자신과 연결할 때만이 객관적인 상황과는 관계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 좋은 삶이란 가진 걸 늘리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걸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진급 누락 되고, 연봉이 오르지 않아도 욕망의 불기둥을 식힐 때 내적 평화에 이른다.
행복의 열쇠는 능력보단 인내력이다. 인내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갈 힘이다. 고통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고난을 기꺼이 수용하는 능력발휘에 행복이 조용히 다가오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