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인에게 자신감을 준 이건희
[기고] 한국인에게 자신감을 준 이건희
  • 정리 = 정하영기자
  • 승인 2020.10.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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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1993년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회장  ( 출처 = 연합뉴스 (삼성 제공) )
1993년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회장 ( 출처 = 연합뉴스 (삼성 제공) )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참관했다. 경기장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서로 통화하는 내용을 들으니 삼성(三星) 앞에서 만나자는 얘기가 많았다. 삼성 앞에서? 그런데 스트랫퍼드(Stratford)에 있는 올림픽 파크에 가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큰 길 두 개가 갈라지는 가운데에 삼성의 전시관이 있었다. 거기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육상을 보든 수영을 보든 갈라지고 그곳에서 만나 이 식당, 저 식당으로 들어갔다. 지구촌 최대의 축제장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한국 기업의 전시관은 세계인의 이정표였다. 새삼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다. 코리아는 몰라도 삼성이 있는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모두가 ‘엄지척’이었다. 그 삼성을 만든 이가 이건희 회장이다.

인도에 출장 가서였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중국인이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자기 딸이 대학에 붙었는데 입학 선물로 삼성 휴대폰을 원해서 그걸 사줬다고 했다. 대신 자기는 딸의 중고 휴대폰을 받아쓰게 됐지만 딸이 삼성 폰으로 행복해하니 자기도 덩달아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은 삼성이 있어 좋겠다고 말했고 나도 그렇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이 일군 삼성 덕분에 나도 어깨가 으쓱거렸다. 물론 운전기사에게는 팁이 두둑이 주어졌다.

2002년 9월 전경련회장단 월례회의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 출처 = 연합뉴스 (삼성 제공))
2002년 9월 전경련회장단 월례회의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 출처 = 연합뉴스 (삼성 제공))

이건희 회장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전경련 회의에서는 여러 번 뵀다. 심지어 1m도 안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얘기를 들으며 기록을 한 적도 있다. 1994년 2월 제 2이동통신 사업자 선점을 위한 전경련 회장단 회의 석상에서였다.

이 날은 정부가 사업자 선정을 해 달라고 전경련에 제시한 시한의 마지막 날이었다. 긴장된 표정의 최종현 회장이 개의를 하면서 이건희 회장과 쌍용의 김석원 회장에게 사전 심의를 요청했다. 코오롱과 포항종합제철 중 어느 쪽이 대주주 역할에 부합하는 지를 심의해 전체 회장단 회의에 올려달라고 했다. 두 분의 회장이 옆방으로 이동했고 기록을 맡은 필자도 같이 옮겨갔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단일 컨소시움을 제안했다. 두 회사의 지분을 충분히 배려해줄 테니 1대 주주의 선정은 회장단에 위임해 달라고 했다. 만약 여기에 불응하면 1%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재계의 성숙한 자율역량을 정부와 국민에게 보여주자며 양사의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코오롱과 포항종합제철은 이건희 회장의 제안을 따랐고 사상 최초로 재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움이 구성됐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며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며 미뤄져왔던 제 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이 정경유착의 의혹이나 당사자 불복과 같은 구설수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된 것은 이건희 회장의 논리적 설득이 주효했다고 본다.

그 후 한국의 정보통신(IT)산업이 궤도에 올라 우리나라가 IT강국으로 도약한 것은 여느 국책사업과 달리 초기에 이러한 잡음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 이것도 이건희 회장의 1공이라 생각된다.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전경련의 기획본부장으로 있으면서 5대 그룹의 구조조정 활동을 지켜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순전히 개인적인 흥미로 회장들의 일하는 패턴을 언론에서 보고 재미있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가장 일찍 출근하는 분은 대우, 회사에서 날 밤을 새울 정도로 아예 퇴근 시간이 없었다. 그 다음은 현대, 4시 반에 아침을 먹고 걸어서 사무실까지 출근했다고 보도됐다. LG 회장은 전형적인 9to5였다. SK 최종현 회장은 12시 반이 출근시간이었다. 오전에는 사장들이 바쁘니 찾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은 아예 출근을 안 했다. 회장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뉴스가 될 정도였다. 회장이 출근도 안하는 삼성은 무섭게 커 갔고 가장 오랫동안 회사에 머물렀던 대우는 어려워졌다. 회장의 출근 패턴과 회사의 성과가 무슨 연관이 있겠냐 만은 그 후 사석에서 이 얘기를 꺼내면 모두가 그럴 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경영학 교수는 이 얘기를 듣고 오너와 전문 경영인간 책임과 권한을 적절히 배분하는 사례로 연구해봐야겠다고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일했던 재계는 물론 우리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격려도 하고 질책도 했다. 정치 4류, 행정 3류, 기업 2류 같은 발언은 기업이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서로 부족함을 메워 주자고 한 말인데 정치가 이걸 곡해했다.

회사는 세무조사를 받고 회장은 자기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떠돌았다. 그의 용감한 발언 이후 기업은 정치에 말문을 닫았다. 그 후 정치는 더욱 퇴보했고 기업은 세계 1류로 커갔다. 그 넓어진 간격이 오늘날 사회적 갈등을 보는 시각의 차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시장경제를 주장하고 글로벌라이제이션을 국가경영의 원리로 제시한 SK의 최종현 회장을 무척 따랐다.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할 때는 일부러 최회장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고도 했다. 은둔의 경영자라고 했지만 최종현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회장단 회의에 가급적 빠지지 않으려 했고 실제로 많이 참석해 전경련과 재계의 활동이 활성화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 용인에 있는 중소기업 연수원은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을 위한 최 회장의 제안을 이 회장이 수락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의 바람대로 사회와 기업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같이 발전하는 것은 이제 후손들의 몫으로 남았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인의 어깨를 펴게 했다. 변방이었던 한국에 세계 1등의 자신감을 줬다. 이건희 회장과 같이했던 이 시대의 한국은 행운이었다.

이건희 회장 중고 시절(맨 왼쪽이 이건희 회장)  ( 출처 = 서울사대부고 동창회보 )
이건희 회장 중고 시절(맨 왼쪽이 이건희 회장) ( 출처 = 서울사대부고 동창회보 )

글 : 권오용=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전 효성그룹 상임고문, SK 부사장, 전경련 기획홍보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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