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슬기로운 직장생활] 불안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현대인은 왜 불안한가?

2026-11-05     김진혁
김진혁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가장 흔한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불안’일 것이다. 먹을 것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전쟁이 일상이라서도 아니다.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일을 거들지만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많은 불안을 안고 산다. 왜 가장 풍요로운 시대가 가장 불안한 시대가 되었을까?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불렀다. 과거의 위험은 홍수나 전쟁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의 위험은 미세먼지, 금융위기, 기후변화, 일자리 상실, 개인정보 유출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며 산다. 불안은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크게 자란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액체 근대’라고 설명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흐르고 고정된 것이 없다. 평생직장은 사라졌고, 인간관계는 쉽게 맺어지고 쉽게 끊어진다. 기술은 몇 해 만에 낡고, 지식도 금세 오래된다. 붙잡을 만한 단단한 바닥이 없으니 사람들은 무엇 하나 쥐지 못한 채 흔들린다.

심리학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 불렀다. 절벽 끝에 선 사람이 떨어질까 봐 겁나는 동시에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어지러움을 느끼듯, 인간은 선택할 수 있기에 불안하다는 것이다. 새는 본능대로 날지만 인간은 선택해야 한다. 어떤 직장에 갈지, 누구와 살지, 어떤 삶을 살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선택이 많아질수록 자유는 커지지만 불안도 함께 커진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선택이 늘면 행복도 커지리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는 이를 ‘선택의 역설’이라 불렀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만족은 줄고 후회는 늘어난다. 잘못 고를까 두려워 결정을 미루고, 결정한 뒤에도 “다른 길이 더 나았을까” 하고 마음이 흔들린다.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남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과 판단을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하려 할 때 스스로 감옥에 갇힌다는 통찰이다. 남의 눈에 비친 내가 곧 나라고 믿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는 갈대가 된다. 여기에 SNS가 불을 붙였다. 우리는 타인의 가장 빛나는 순간만 본다. 누구는 여행을 떠났고, 누구는 승진했고, 누구는 결혼했고, 누구는 큰돈을 벌었다. 그 화려한 장면 뒤의 눈물과 실패는 화면 밖에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사회적 비교’라고 부른다. 비교는 감사를 키우지 않고 결핍을 키운다. 남의 가장 좋은 날과 나의 가장 평범한 날을 맞세우면,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 된다.

여기에 물질을 앞세우는 풍조와 끝없는 욕망이 겹친다. 더 가져야 안전하고 더 완벽해야 인정받는다는 믿음이 우리를 몰아세운다. 그러나 욕망은 채울수록 갈증이 커지는 바닷물과 같다. 불안은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데 인류는 불안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불안 속에서 인간이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고 보았다. 일상의 소음에 묻혀 지내던 우리가 불안이라는 낯선 손님 앞에서 멈춰 서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묻자. 죽음을 의식할 때 삶이 선명해지듯, 불안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내면의 신호이다.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라고 적었다. 미래를 걱정하지만, 실제로는 미래 자체보다 미래를 상상하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더 괴롭다. 스토아 철학이 건네는 지혜는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날씨는 바꿀 수 없고, 주식시장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타인의 평가도 내 손 밖에 있다.

그러나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고, 나의 말과 행동은 내가 고를 수 있다. 불안을 줄이는 첫걸음은 세상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내 손이 닿는 곳에 힘을 쏟는 일이다. 이 지혜를 가장 극적으로 증언한 사람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다. 그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에게도 끝까지 남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으로 이 경험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담았다.

인문학은 불안을 없애 주는 학문이 아니다. 불안을 견디는 지혜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도, 단테의 『신곡』도,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모두 인간의 불안과 방황에서 출발한다. 위대한 문학은 불안을 지우지 않고 대신 불안을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인이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돈, 시간도 아닌 의미다. 왜 일하는지, 왜 사는지 등을 잊어버릴 때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어떻게’를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삶의 목적은 불안을 없애지 못하지만 불안을 이길 힘을 준다. 같은 비바람에도 목적지가 있는 배는 닻을 내리고 버티지만, 방향을 잃은 배는 파도마다 흔들린다. 오늘 우리는 속도를 숭배하지만, 속도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멈추어 서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다. 산책하고, 책을 읽고, 기도하고, 감사한 일을 적어 보는 사람은 불안에 끌려다니지 않고 불안을 다스린다. 심리학 연구들은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보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기대고 지지하는 사람이 어려움에서 더 잘 일어선다.

인간은 경쟁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인간의 적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이다. “무엇을 가질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사람은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불안을 없애려는 사람은 평생 불안과 싸우지만, 불안을 삶의 스승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안에서 성숙을 배운다.

우리가 진정으로 되찾아야 할 것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성찰, 곁에 있는 사람들의 온기, 그리고 나보다 더 큰 가치를 향한 믿음이다. 그것이야말로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이들에게 가장 오래된 가장 새로운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