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위험성평가도 함부로 손 못 대는 ‘터줏대감’입니까?

위험성평가, 서류 아닌 현장에서 다시 시작해야 공장책임자 허용가능 위험 기준 정하고 실질적 개선 선도 “점수보다 작업자의 말 먼저”…다음 책임자에 ‘현장’ 물려줘야

2026-10-12     박인규

정예산업안전컨설팅 산업안전지도사 박인규

철강업계에 신속하고 유익한 정보 제공을 통해 철강산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페로타임즈는 주요 현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업계의 실질적인 대응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각 분야 전문가들의 기고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철강제조업에서 31년간 근무하고 안전보건총괄책임자를 역임한 박인규 산업안전지도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오랜 철강 현장 경험과 산업안전 전문성을 바탕으로 위험성평가와 중대재해 예방, 안전관리체계 구축 등 현장의 안전보건 문제를 실무 중심으로 풀어갈 예정입니다.

필자는 철강회사 한 곳에서만 31년을 근무했고, 퇴직 전 약 6년간 안전보건총괄책임자를 맡았다. 지금은 산업안전지도사라는 명함을 들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초짜 컨설턴트다.

최근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 전부개정 고시안이 행정예고됐다. 이 글에서는 제도 해설보다 먼저, 오랫동안 현장을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나의 반성부터 해보고자 한다.
 

■ 새 공장의 첫날이라면

상상을 하나 해 본다. 공장이 새로 지어지고 내가 그 공장의 첫 공장장이 된다. 첫 원료가 투입되고 첫 제품이 나오기 전, 설비 배치도를 펼쳐 놓고 크레인 동선과 위험 작업 구역을 따져 본다.

작업자들과 함께 설비 라인을 걸으며 “여기서 다칠 수 있겠다”를 하나씩 짚고, 어디까지의 위험을 감수할지 기준도 정한다. 이렇게 시작한 위험성평가라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실질적이었을 것이다.
 

■ 그러나 현실은 터줏대감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공장책임자나 위험성평가 실무자가 되는 시점에는 이미 위험성평가가 어떤 형식으로든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다.

해마다 연도만 바뀌는 평가표, 위험도 점수를 맞추기 위한 회의, 인정심사나 감독 때 꺼내 보는 서류철이 그렇다. 평가표에는 ‘위험도 낮음’으로 적혀 있지만 작업자는 매일 아슬아슬하게 작업하는 경우도 있다.

전임자들이 만들어 놓았고 그럭저럭 굴러온 체계인 만큼 이를 다시 뜯어고치는 일도 쉽지 않다.
 

■ 제대로 해볼 뻔했던 그때

고백하자면 나에게도 위험성평가를 제대로 해 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노조와의 협의, 사업계획 등 늘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뒤로 밀었다. 산재라도 나야 “이번에는 제대로 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기억이 더 많다.

책임자와 담당자가 바뀌어도 터줏대감 같은 서류는 남았다. 위험성평가는 겉만 새로워졌을 뿐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역설적이게도 내가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위험성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 글은 그 부끄러움에서 출발한다.
 

■ 책상에서 현장으로 걸어 나온 제도

위험성평가 제도는 꾸준히 현장 중심으로 바뀌어 왔다. 과거에는 빈도와 강도를 곱해 점수를 내는 것이 평가처럼 여겨졌고, 근로자 참여도 서명 한 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유해·위험요인을 현장 순회점검을 통해 파악하고, 근로자가 요인 파악부터 개선 후 확인까지 참여하도록 방향이 바뀌고 있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해당 원인뿐 아니라 사업장 전체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

개선대책까지 수립해야 위험성평가가 끝난다는 취지다. 한마디로 “서류를 만들라”던 제도가 이제는 “현장에서 하고, 개선까지 확인하라”며 책상을 박차고 나온 셈이다.
 

■ 공장책임자가 할 일, 실무자가 할 일

공장 최고관리자의 역할은 분명하다. 어디까지의 위험을 허용할지 기준을 정하고, 보호구나 교육에만 의존하지 말고 위험의 제거·대체와 설비 개선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예산이 필요한 개선에는 예산을 붙이고, 시간이 걸린다면 잠정조치를 지시해야 한다. 협력업체 혼재 작업이 많은 철강현장이라면 도급인과 수급인이 함께 평가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장책임자가 직접 현장을 걷는 모습 자체가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실무자와 관리감독자의 몫도 현장에 있다. 작업자와 함께 걷고, 아차사고를 흘려듣지 말고,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를 형식이 아닌 대화로 만들어야 한다. 개선대책을 시행한 뒤 실제 위험이 허용 가능한 수준까지 낮아졌는지 다시 확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 부수지 말고, 다시 시작할 지점을 만들자

터줏대감을 한 번에 몰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개정은 실시규정을 다시 살펴보고 위험성평가를 새롭게 시작할 좋은 계기다.

공장 전체가 아니어도 좋다. 공정 하나, 라인 하나라도 ‘새 공장의 첫날’처럼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빈 평가표를 채우기 전에 현장을 먼저 걷고, 점수보다 작업자의 말을 먼저 적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흔히 ‘피로 쓰인 법’이라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사업장의 ‘고인물’을 제대로 들여다볼 때다. 다음 위험성평가가 누군가의 피로 다시 쓰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기억해야 한다. 지금 내가 만드는 위험성평가는 다음 책임자와 담당자에게 또 하나의 터줏대감이 된다. 나는 서류를 물려받았고, 서류를 물려주었다.

이제는 서류가 아니라 현장을 물려주는 책임자와 실무자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필자 프로필] 박인규 정예산업안전컨설팅 대표

 

산업안전지도사·ISO 45001 심사원

철강제조업 31년 근무

안전보건총괄책임자 6년

일학습병행제 기업현장 교수

한국철강협회 동영상 강좌 촬영

중처법 체계구축·이행점검, 위험성평가, 안전관리 대행 및 산재예방 기술자문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