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슬기로운 직장생활] 악의 도착(倒着)
- 선(善)의 얼굴을 하고 오는 폭력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해악이다.” - R. 데카르트
얼마 전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나쁜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처음엔 흘려들었지만, 곱씹을수록 섬뜩한 말이었다. 인류사의 가장 잔혹한 폭력들은 스스로를 ‘악’이라 부른 적이 없다. 오히려 정의, 질서, 순수, 구원 같은 선(善)의 언어를 입고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악의 도착증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정상, 심지어 미덕으로 착각하거나 그렇게 믿기로 선택하는 심리적·도덕적 전도(顚倒) 현상이다.
아이히만, 그리고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본 것은 광기 어린 악마가 아니라, 그저 상부의 지시를 성실히 이행한 평범한 관료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유대인 수백만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열차 시간표를 짜면서도, 스스로를 법과 규정을 준수한 ‘모범 공무원’이라 여겼다.
아렌트는 이 현상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악은 반드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하기를 멈춘 자리,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자리에서 자라난다는 것이다.
칸트의 근본악과 아렌트의 결별
흥미로운 것은 아렌트가 이 개념에 이르기까지 칸트와 오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의지 안에 도덕법칙을 거스르려는 성향, 즉 ‘근본악(radikales Böse)’이 이미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선을 알면서도 자기애를 도덕법칙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 성향은 어디까지나 ‘의지의 선택’ 문제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보며 이 틀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악한 의지를 품은 것이 아니라, 아예 사유(思惟) 자체를 하지 않았다. 칸트가 말한 ‘악해지기로 선택하는 인간’과 달리, 아이히만은 선악을 판단할 능력 자체를 반납한 인간이었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는 스승격인 칸트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 즉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저지르는 악’을 제시하게 된다.
선의로 포장된 폭력들
“과거를 기억 못 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 조지 산타야나
역사는 이 도착증의 사례로 가득하다. 나치 독일의 T4 프로그램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규정해 안락사시켰는데, 이는 ‘자비’와 ‘순수한 민족 공동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됐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혁명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수백만 명을 처형장으로 보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는 ‘농경 유토피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인구의 4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았다. 1978년 존스타운 집단자살 사건에서 짐 존스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그것이 ‘혁명적 자살’이자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
“그간 우리에게 가장 큰 피해를 끼친 말은 바로 ‘지금껏 항상 그렇게 해왔어’라는 말이다.” - 그레이스 호퍼
심리학 실험들도 이 어두운 진실을 뒷받침한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에서 평범한 참가자들은 권위자의 지시만으로 타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전기 충격을 가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에서는 역할극에 불과했던 ‘교도관’들이 며칠 만에 실제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이들 모두 자신을 악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실험에 협조하는 것’,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호기심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있다. 영원성, 생명, 현실의 놀라운 구조를 숙고하는 사람은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매일 이러한 비밀의 실타래를 한 가닥씩 푸는 것으로 족하다. 신성한 호기심을 절대 잃지 말라.” - 알버트 아인슈타인
도착증의 핵심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악은 스스로를 악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애국, 신앙, 규율, 효율, 심지어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려 온다. 아렌트가 우리에게 남긴 경고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거대한 이념이나 광기가 아니라, 질문하기를 멈춘 순간, 타인의 자리에서 생각하기를 포기한 순간이 악이 스며드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명분들 속에도, 어쩌면 그 도착의 씨앗이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는 것, 그것만이 이 오래된 도착증에 맞서는 유일한 백신이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 버트런드 러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