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준 칼럼] 엔저(円低)의 두 얼굴

2026-08-25     남영준
남영준

최근 일본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말을 한다. 밥값이 한국보다 싸더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점심 한 끼 먹으려면 10,000원이 훌쩍 넘는데, 일본 서민 식당은 그보다 저렴한 경우가 많다.

물건 값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다 일본 정부는 엔저로 수입 물가가 오르자 편의점이나 마트 등에서 판매하는 식료품 소비세율을 내년 4월부터 2년간 8%에서 1%로 낮출 방침이다. 관광객에게는 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환율 숫자 하나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할 수 있을까. 1달러에 160엔. 40년 만에 가장 싼 엔화다. 원화로 따지면 100엔에 800원대 후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1,000원을 훌쩍 넘던 값이다.

화폐 가치란 결국 그 나라의 체력을 보여주는 성적표인데, 일본의 성적표가 이렇게 낮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금리를 보자. 미국은 오랫동안 고금리를 유지했고, 일본은행은 완화적 통화정책을 고수했다. 돈은 이자를 많이 주는 곳으로 흐른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조건이 좋은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투자자들도 다르지 않다. 수익률이 높은 달러를 택하니, 엔화는 자연히 힘을 잃었다.

여기에 일본 스스로 엔화를 밀어낸 측면이 있다. 일본 연기금과 보험사, 그리고 개인투자자들까지 해외 주식과 미국 채권으로 자산을 옮기고 있다. 자국 통화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 그 나라 국민조차 그 통화를 붙잡지 않는다.

여기에 GDP 대비 260%에 이르는 국가부채는 엔화의 신뢰를 갉아먹는 또 다른 요인이다. 빚이 많은 사람의 신용카드를 믿고 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엔저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답은 간단하지 않다. 세상일이 대개 그렇듯, 이 문제는 누구의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동차, 기계, 화학 같은 업종은 해외 시장에서 엔저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타격을 받는다. 일본 제품이 달러 기준으로 싸지면, 우리 제품의 가격 매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다만 예전만큼 타격이 크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기술력과 브랜드로 버티는 힘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니, 이것대로 반가운 변화다.

반대로 웃는 산업이 있다.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등 일본 내 프리미엄 화장품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은 엔화 약세로 일본 현지 가격 경쟁력이 좋아진다. 오스템임플란트 등 일본 치과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기업이나,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일본 제약사와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한 기업들은 일본 시장 진출에 유리한 환경을 맞는다. 같은 엔저인데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는다. 시장이란 원래 그런 곳이다.

가장 아픈 곳은 철강 산업이다. 중국산 저가 철강으로 이미 힘든 상황에,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산 철강까지 밀려든다. 앞뒤로 포위당한 형국이니, 철강 기업들은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반덤핑 제소 검토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은 또 다르다. 일본 여행과 직구가 늘면서 돈이 밖으로 나간다는 걱정이 있는가 하면, 일본산 소재와 부품을 싸게 들여올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하나의 현상이 이렇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우리 삶 곳곳에 파고든다.

결국, 엔저는 남의 나라 환율 뉴스가 아니다. 수출 기업의 손익계산서에, 화장품 매대의 가격표에, 철강회사의 구조조정 회의에 모두 스며들어 있다. 환율은 조용히 움직이지만, 그 파장은 조용하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엔저를 탓하는 일이 아니라, 그 흐름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취할지 냉정하게 가려내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