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슬기로운 직장생활] 편견과 오만 – 정의와 공정의 착각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적게 알고, 확신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대니얼 카너먼(프린스턴대학교 명예교수)
하루가 멀게 진화하는 AI 시대, 인간의 노동과 감정까지 대체하려는 피지컬 AI의 발전 속도에 현기증을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야말로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거친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행복이란 단어조차 잊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 든다. 물질은 풍부해졌지만, 부와 권력에 의해 가치가 재단되고 공정과 평등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나 ‘공정’은 최대 화두였고, 자본주의의 관심은 결과의 평등보다는 기회의 평등을 내세웠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극소수 사람들의 영웅적인 성공 사례에 고무되어 다른 이들도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들이 벗어나고픈 환경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불평등의 해답은 이동성’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정치를 추구할 수 있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비과학적 통계라면서 하버드대생의 75~80%는 첫째 아이다. 그 까닭은 학생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첫째라서 받는 기대와 관심 때문으로, 태어난 것이 그의 능력일 수 없지 않은가? 과정이 공정하다고 구조적 불일치가 해소되고, 능력에 따른 불평등도 사라질지는 의문이다. 출발선을 같이하고 불평등 개선을 교육에서 찾는다고 공정해질까? 많은 사회학 연구에서 지적하듯이 인간이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욕망의 끝이 없고, 일직선으로 나아가려는데 비해 공정과 행복은 반복을 통한 나선형 구조라는 것이다.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은 끝났다. 누구나 정보에 쉽게 접근하여 삶과 공동체의 의미를 취사선택하는 가치 부여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고 있다. 단순히 공정하다거나 행복해졌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는 없다. 공정은 각자 정보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선택의 결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평가이자 해석이다. 존 롤스(John Rawls)의 말이다. “공정한 결정은 무지의 장막 뒤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정의는 사회 내의 다른 모든 가치보다 최우선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동등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편견과 오만이 자리 잡고 흘러왔다.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인 편견은 충분히 알기 전에 판단하는 태도이고, 오만은 이미 안다고 착각하는 태도다. 이 둘은 서로를 강화하며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무너뜨려 왔다. 따라서 편견이 질문을 막고, 오만이 성찰을 거부할 때 인간은 가장 위험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실패가 지식이 많고, 권력을 쥐고 성공한 집단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돈과 부가 모든 사회를 관통하는 자본주의의 공정한 룰로 인해 승자는 더 성공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피리는 최고의 연주자에게 주어야 한다”라고 분배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현실은 패자에겐 승자독식의 학벌과 능력주의로 인해 배려와 재기의 기회가 사라졌고, 사회 통합이 다양성으로 인해 어렵다.
“우리는 우월하다”라는 고대 그리스는 이성을 중시한 문명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뚜렷한 편견의 사회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을 ‘문명인’이라 불렀고, 외국인은 ‘바르바로이(야만인)’라 칭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시민에게만 허용되었고, 여성과 노예는 정치적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편견은 수백 년간 지속되었고, 그리스 철학의 위대함과는 별개로 분명한 한계로 남았다.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 역시 오만의 전형적인 사례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유럽인들에게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명분을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제도를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화를 미개하다고 단정했다. 이 오만은 식민 지배, 문화 말살, 인종 차별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문제는 당시 유럽인들이 스스로 잔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오히려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다. 편견은 언제나 도덕의 언어를 빌려 자신을 정당화한다. 결국 편견과 오만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기에 사라지기 어렵다.
그렇다면 편견과 오만의 해법을 인문학에서 답을 구해본다. 첫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겸손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세계가 나보다 넓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지성이다. 둘째, 질문하는 습관. “내가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강력한 도구다. 셋째, 경험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넷째, 제도적 장치, 조직과 사회는 이견을 말해도 불이익이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침묵은 안전한 사회에서 오만을 키운다. 다섯 번째, 배움의 끝을 저지시킨다. 배움의 끝은 확신이 아니라 성찰이다. 그 밖에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 역사의 실패를 기억하려는 태도,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용기다.
볼테르의 “편견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에서 태어난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위험한 무지는, 이미 안다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편견과 오만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의지의 부족에서 생긴다는 점을 기억하고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