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슬기로운 직장생활] 침묵의 힘
“지혜에서도 상책(上策)은 침묵하는 것이고, 중책(中策)은 말을 적당히, 적게 하는 것이며,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말이 아니더라도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 프랑스 문필가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아인슈타인은 인생의 성공법칙을 S=X+Y+Z로 표현했다. 여기서 S는 인생의 성공, X는 일, Y는 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Z는 무엇인가? 바로 침묵이다. 일과 노는 것을 열심히 하면서도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할 줄 아는 삶의 여유로운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침묵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침묵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대화에 있어 침묵은 가장 강력하고 최후 무기가 된다.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마음을 정리하며,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기술이다. 침묵은 하나의 능력으로,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다. 그래서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한다.
말은 많이 하면 할수록 평범해지고 권위가 없어진다. 말로 인상을 남기려 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생각할 여지가 없는 말은 진부할 뿐이다. 말을 많이 할수록 후회할 말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침묵은 최고의 가르침이자 우렁찬 기도이다. 자주 인용되는 서양 격언으로 “현명한 머리가 무거운 입을 만든다”,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침묵은 반박이 가장 어려운 논법 중의 하나다”, “침묵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을 철학자로 생각할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보다 침묵이 오히려 사교성을 잃지 않는다”
2013년 노르웨이 과학기술대학 연구에 따르면 10분간의 침묵이 스트레스를 줄이고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이는데 효과적이다. 침묵은 신체 건강에도 긍정적 효과가 있다. 예를 들면 심박수와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침묵의 힘을 경험하고 싶다면? 1.명상시간을 자주 갖기: 눈을 감고 호흡을 깊게 하여 머릿속의 잡념을 비워낸다. 2.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산책하거나 음악을 듣고, 독서를 통해 자아를 이해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 3.디지털 디톡스 실천하기: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로부터 멀리 떨어진다. 디지털 기계를 멀리할 때 주의력을 높이고 실질적인 인간관계를 즐길 수 있다. 4.자연 속에서 침묵 찾기: 자연과의 교감은 내면의 평화를 얻게 하며 자신이 우주의 일부임을 깨닫고 겸손함과 감사함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면서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금과 은은 순수한 물에서 잴 수 있듯이, 영혼을 시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침묵 속에서다” 벨기에 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1862-1949)는 많은 시간을 무의미한 소리를 지껄이는 데 낭비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막스 피카라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이란 단순히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표현 방식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강력하게 말하는 것이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하나님의 시간과 시선이 인간과의 차이를 느꼈다. 천주교 금지령이 내린 1640년경, 천주교 박해가 절정에 이른 때였다. 일본에 밀입국한 로드리고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천주교를 전파하던 중 악덕 영주에게 붙잡히면서 배교를 강요당한다. 일본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를 잡아와서 예수님의 초상화를 발로 밟고 그 위에 침을 뱉으라고 강요했다. 그들의 말에 거부한 사람을 바닷가에서 처형했다. 십자가로 만들어진 기둥을 파도가 밀려가는 바닷가에 세우고 그들을 거기에 묶어 바닷물에 잠겨 죽게 했다.
그것을 지켜본 로드리고 신부에게도 절체절명의 순간,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해 계속 기도하나 하나님께서는 계속 침묵하신다. 로드리고 신부는 침묵 속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나를 밟아야 한다. 너희들을 위해 밟히러 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그는 통곡하면서 그 성화를 밟는다. 이 사건은 다른 동료 신부를 통해 로마 교황청에 전달되고, 교황청은 그를 파문한다. 파문당한 신부는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계속 천주교를 확산시켜 나가는 역할을 했다.
인간의 시선은 교황청까지가 마지막이라 생각되지만, 신부의 삶은 하나님의 시선 속에 영원히 머물렀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가타모리는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신학』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신다”고 주장했다.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절망을 항변했다.
“Are you sleeping GOD”, “Are you dead GOD?” 그런데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이런 유명한 문구도 있었다. “나는 믿노라. 태양이 있음을 믿노라/ 비록 태양이 구름에 가리었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노라/ 나는 믿노라 하나님이 계심을 믿노라/ 비록 그분이 내게 아무 말씀하지 않으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노라.”
침묵도 언어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