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산업을 뒤흔든 사건 2] 삼미특수강의 침몰과 현대비앤지스틸의 탄생
[철강산업을 뒤흔든 사건 2] 삼미특수강의 침몰과 현대비앤지스틸의 탄생
  • 김종대 페로타임즈 대표
  • 승인 2019.07.17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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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양특수강의 초창기 울산 여천동에 공장 건설 연산 2만4,000톤 규모
- 加,美 특수강 공장 4개 인수 브레이크 없는 투자행보 삼미특수강 부도에 내몰려

[철강산업을 뒤흔든 사건1] 냉연의 눈물...일신제강과 연합철강의 흥망성쇠

현대비앤지스틸의 대중 인지도는 높지 않다. 삼미특수강을 인수하여 사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시계 바늘을 1960년대로 되돌려 특수강 메이커의 험난했던 부침의 역사를 엿본다.

‘네버 스탠드 스틸’(Never Stand Still).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현대비앤지스틸 50년사의 타이틀이다. 그만큼 이 회사의 역사는 부침이 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국 최초의 특수강메이커는 1937년에 발족한 ‘일본고주파중공업(주)’이다. 생산품은 모두 군수용이었다. 시작부터 대륙침략이라는 역사를 품고 탄생한 이 회사는 해방이 되자 공장도 없어졌다. 한국은 특수강의 불모지가 되고 말았다.
 

캐나다 삼미아틀라스 (주)의 삼미아틀라스트레이시 공장 전경(사진 좌측) 삼미는 미국과 캐나다에 무리한 투자를 강행, 결국 기업을 인천제철에 넘기게 되었다. 2000년 인천제철과 채권단은 삼미특수강을 정식 인수했다. 사진(우축)은 합병 조인식
캐나다 삼미아틀라스(주)의 삼미아틀라스트레이시 공장 전경(좌측) 삼미는 미국과 캐나다에 무리한 투자를 강행, 결국 기업을 인천제철에 넘기게 되었다. 2000년 인천제철과 채권단은 삼미특수강을 정식 인수했다. (우측)은 합병 조인식 광경. 사진=현대비앤지스틸 사사

삼양특수강 첫 2만4,000톤 생산

삼양특수강은 1966년도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가 현대비앤지스틸의 전신이다. 삼양특수강은 설립된 해의 4월에 경남 울산시 남구 여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이곳에서 연산 2만4,000톤 규모의 스테인리스 냉연강판을 생산했다.

국내 최초의 삼양특수강은 기업의 형태를 갖춘 첫 특수강 메이커였지만 가공단계에 머물렀던 공장에 불과했다.

스테인리스의 수요는 식기와 같은 주방용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은 놋쇠 식기를 쓰고 있었다.

놋쇠는 닦는 일도 번거롭고 무겁기도 해서 주부들에게 일거리를 만드는 애물 단지였다. 이런 현상을 눈치 챈 수입상들이 일제 스테인리스 그릇을 들여오자 주부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받았다. 녹슬지 않고, 가볍고, 정갈한 모양이라 당연했다.

스테인리스는 일명 ‘스뎅’으로 불리면서 마치 부자들의 전유물로 둔갑되기도 했다. 당시 엿장수들도 스테인리스 식기를 수레에 가득 싣고와 놋쇠와 바꿔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놋쇠로 만든 제기용품과 식기들은 이때 거의 모두 스테인리스와 바꾸어졌다.

삼양특수강(1971년)에서도 스테인리스 식기를 내 놓았으나 일본산에 비해 질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신뢰도마저 낮아 시장에서 거의 유통되지 못했다. 국내 중견 유통상들은 수입품을 판매할 수밖에 없었다.

특수강 수입금지 조치로 회생

이런 환경이 되자 정부는 스테인리스 수입품 금지 조치를 내면서까지 국내업체를 지원했다. 이 정책은 국산 스테인리스 생산 메이커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이때부터 대형 스테인리스 대리점들은 삼양특수강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삼양특수강은 정부가 특수강실수요업체로 지정하자마자 경쟁사였던 한국특수강공업(주)를 인수하고 회사명을 아예 한국특수강으로 변경했다.

삼미가 삼양특수강을 인수한 시기는 삼양특수강이 설립된 1년 후였다. 삼양특수강을 인수한 삼미그룹의 창업주는 김두식 씨이다. 그는 1959년 원목 수입으로 사업 기반을 일구었다. 대일목재공업, 삼미사, 대한철광개발을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 1970년 9월에는 종로에 지상 31층의 삼일빌딩을 준공했다.

한국특수강은 1977년 12월에 연산 25만톤의 생산 능력을 갖춘 대규모의 창원공장을 준공하면서 성장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한다. 창원공장은 33만평의 부지에 특수강봉재 15만 톤, 무계목강관 2만5천톤, 스테인리스 강관 7만5천 톤의 포트폴리오로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70년대 중후반, 한국특수강은 강봉과 강관 제품을 국산화시키고, 국내 처음으로 이음새 없는 무계목강관을 개발한 것을 계기로 독일에 2,000여 톤의 특수강을 처음 수출(1979년)했다.

세계 특수강 왕국의 꿈을 꾸다

삼미그룹의 기반을 닦아 놓은 김두식 회장은 1980년 3월 별세하고 장남 김현철 씨가 그룹회장에 올랐다. 김현철 회장은 취임 2년 후 한국특수강의 사명을 삼미종합특수강으로 변경했다.

삼미특수강은 그룹의 먹거리를 창출하는 효자였다. 일본산업경제신문(1987년4월21일자)은 삼미특수강의 급속한 성장세를 이렇게 보도했다. “삼미특수강은 자동차와 가전에 많이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판재의 매출이 급증하고 있으며 국내 특수강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현철 회장은 해외 특수강메이커의 인수 합병에도 속도를 냈다. 캐나다와 미국의 특수강 공장 4개를 연거푸 인수하거나 합병했다. 투입한 자금이 3,00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스테인리스강 공급은 과잉상태였다. 단일 기업이 특수강을 150만 톤 정도 생산 한다는 것은 전 세계 수요의 절반이 넘는 상황이었다. 김현철 회장의 브레이크 없는 투자행보는 삼미특수강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무리한 해외투자가 암흑을 만들다

결국, 1984년에 특수강 시장에 불어닥친 경기불황과 공급 과잉현상이 본격화되자 삼미그룹은 휘청 거렸다. 삼미슈퍼스타즈 구단 매각(1984년), 31빌딩을 매각하고 겨우 숨통이 트인 삼미그룹은 1985년도 이후에 발생한 ‘3저 호황’을 계기로 재기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1992년도에 일어난 대규모 노사분규 후유증과 계열사들의 부실로 인해 300억 원의 적자를 발생시켰다. 특히 해외공장들은 절망적인 경영악화를 나타냈다. 그룹전체가 위기에 닥쳤다.

정부는 삼미그룹이 파산할 경우를 우려해 1997년3월 창원공장 특수강 봉재와 관재부문을 포항제철에 7,194억 원에 매각했다. 이 자금으로도 해외공장의 부실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삼미특수강은 1997년3월18일 만기도래한 어음을 막지 못해 회사정리 절차를 개시했고 3월19일자로 최종부도 처리되었다.

인천제철 우선협상자로 낙점'

삼미특수강의 제3자 인수는 인천제철과 동부제강컨소시엄(세아제강 등)이 한판 승부를 보았으나 1999년 12월20일 인천제철의 승리로 끝났다. 2000년 12월6일 인천제철은 모든 기업인수 절차를 끝내고 삼미특수강을 품에 안게 된다.

삼미특수강의 부채 1조1,500억 원 중 7,300억 원을 탕감한 4,235억 원을 떠안았다. 그리고 193억 원을 투입, 삼미특수강 지분 51%이상을 취득했다.

삼미특수강의 침몰은 무리한 투자로 귀결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삼미특수강이 비앤지스틸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종사자들 대부분은 같은 공장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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