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현의 인문산책]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택한 실용주의 리더십
[박기현의 인문산책]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택한 실용주의 리더십
  • 박기현
  • 승인 2020.08.20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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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작가 미상의 최명길 초상
연대, 작가 미상의 최명길 초상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 내 대부분의 지도층은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명분론을 내세워 나라야 어떻든 오랑캐에게 무릎은 꿇을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이들 대다수의 척화론자들 사이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고 악역을 자처하며 사직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지도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조판서 최명길이었다.

그는 가문과 자신에게 비난과 모욕적인 포화가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뚝심과 배짱으로 나홀로 실리주의를 선택한 최명길은 모든 사람이‘노’할 때‘예스’를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영웅이었다. 이 글은 최명길의 배짱과 기개를 살펴보는 역사책 뒷이야기이다.

자신 안위 버리고 대의 좇다

그는 사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보위에 세운 반정 공신이었다. 가만있으면 재산과 명예, 자리보전도 가능한 반정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청나라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사대부들에게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지적했다.

1636년 12월 남한산성으로 급히 쫓겨간 인조는 주화와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들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성을 지키는 자는 겨우 1만, 성 안에는 한 달 분 식량만 남아 있는데 척화론을 주장하는 사대부들은 차라리 싸우다 죽자며 전쟁을 소리높이고 있었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성밖에는 20만 청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를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척화론자 중에는 기개 높은 김상헌도 있었다. 그는 당시 화친을 주장하던 최명길이 청군 진영을 출입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의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청나라로 보낼 항복 답서를 쓴 것을 보고 달려들어가 이를 빼앗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그 뿐이지, 조선의 남아들이 어찌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오? 사대부의 명망 있는 아들로 태어나 어찌 이런 일에 나설 수 있단 말이오?”

말을 마친 김상헌은 임금이 보는 앞에서 국서를 찢어버리고 통곡하며 항복을 만류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신료들 가운데 최명길이 나서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찢는 사람이 있으면 붙이는 사람도 있는 법이오.”

최명길은 엎드려 찢어진 국서를 줍고는 다시 붙여 들고 청태종에게 전하러 나갔다. 최명길은 오성 이항복의 제자다. 이항복의 실리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는 평소에도 사물의 본질과 실리를 찾아 이를 실천하는 지식이었다.

병자호란의 실리론도 이같은 그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명길의 시간 벌기와 목숨을 건 주화론 끝에 항복조건이 협상되었다. 청나라 병사들이 삼전도에 수항단(受降檀)을 높이 쌓아 인조가 그 자리에서 청 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리게 했다. 이어서 두 왕자의 인질, 수많은 장수와 신하들의 감금과 유배가 있었다. 역사는 이를 두고 삼전도의 치욕이라 불렀다.

하지만 군주와 사대부들은 치욕스러웠으나 전쟁이 끝난 나라와 백성은 살아남았다. 최명길은 임금의 치욕적인 항복에 대해 계속해서 말이 나오자

“일부 신하들은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데 쓰는 말이다. 종묘와 사직의 존망이 일개 개인의 일과 같을 수는 없다.”라고 항변하며 인조에게 말했다.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경망하게 큰 소리만 치고 저들의 노여움을 도발한다면 결국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는 더 큰 허물이 됩니다. 국력은 바닥이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합니다. 우선 화친하고 당장의 화를 늦추십시오. 그 동안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으며, 군량저축과 방어시설을 갖춰 적의 허점을 노려야 합니다.”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택하자는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단기필마, 목숨 버려 협상 성공시키다

그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아까워서 교섭을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단기필마로 청군으로 달려 들어가 청태조와 협상을 하는 용기와 배짱을 보였다. 덕분에 시간을 번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데리고 간신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 당시 아무도 최명길을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신하들은 없었다.

그는 후일 정승의 반열에 올랐지만 자신을 위한 재산을 만들지 않고, 공직자의 기강을 엄격히 세워 전란의 수습에 최선을 다했으며 후일 청나라에 끌려가 모진 옥살이를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고 늘 후덕한 웃음과 강직한 처신으로 정무에 임했다.

“화살은 내게 돌려라. 백성을 살리는 것이 내 할 일이다.”

이런 최명길 덕분에 인조와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으니 최명길이야말로 악역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라와 군주를 구한 누란지위(累卵之危)의 구국 영웅이었다.

세월이 4백년 가까이 흘렀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병자호란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자칫 치명적인 원죄를 짊어지게 되지 않을까? 최명길은 이승에서 후손들의 선택을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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