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현의 인문산책] 조선통신사 일본을 너무 얕본 것일까②
[박기현의 인문산책] 조선통신사 일본을 너무 얕본 것일까②
  • 박기현
  • 승인 2019.06.2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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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한 일방적 소통?

경제적으로는 양국이 이 교류로 인해 서로 혜택을 보았다. 무역이 늘어나면서 고추와 호박과 담배 고구마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먹거리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었고 일본도 많은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이 교류는 아무래도 일본에게만 더 유리한 상태로 계속되었다. 왜관은 조선에 있었지만 일본에 한인관은 설치되지 않았다. 왜국에 미개한 야만민족이라는 선입견에 뭐 배울게 있느냐는 문화적 교만도 한 몫 한 셈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의 중요한 정보가 그들에게 차례로 넘어갔다.

학문과 법례, 제도가 전해짐은 물론이고 문화인들(학자와 예술인, 의료인 등 전문가 집단)이 일본에 들어가 신지식을 전해 주었으며 「동의보감」,「의방유치」 등의 전문서적들이 이 때 전해졌다. 허준의 「동의보감」같은 책은 일본이 가장 탐내던 의서였지만 일본으로 넘어가 조선 인삼의 특별한 효능과 비밀이 공개되는 바람에 일본에 인삼열풍이 불게 되었고 쇼군이 밀정을 보내 조선 인삼의 씨앗을 수배케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조선통신사래조도(부산박물관).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은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국교가 탄절되면서 중단됐다.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 문화양식 등 모든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래조도(부산박물관).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은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국교가 탄절되면서 중단됐다.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 문화양식 등 모든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쇼군은 조선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조선을 낱낱이 파악해 가고 있었다. 심지어 함경도 꽃뱀에서 제주도 고슴도치까지 모두 178종의 동식물을 채집했다는 정보도 기록되어 있고, 조선인이 좋아하는 음식과 유교적 소소한 예절까지 수집해 갔다. 그럼에도 통신사는 쇼군의 정치적 의도와 이면의 야욕을 모른 채 많은 정보를 흘려보냈다.

한 번의 통신사 행차에 일본 측이 무려 100만 냥의 돈을 쓰고 33만 여명의 연인원을 동원 환대하는 모습에 취해 버린 것이었을까? 조선 조정도 통신사측도 일본을 경계한 모습들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돌아와 기록한 여행기에서 학문적 교만이 묻어나기도 했다.

1811년 순조 11년을 마지막으로 통신사 교류는 끝이 난다. 일본에서 사실상 거부한 것이었다.

정보의 교류를 더 헤아리고 살피는 신중함 필요

문화나 경제교류나 모든 접촉은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지만 언제나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정보의 교류나 거래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만 득을 보는 거래는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다. 주고받을 때 상호 도움이 되는지, 이 교류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한일간의 문화교류에서 통신사 교류는 일방적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흘러갔다. 이 교류는 조선에는 큰 득이 없었으나 일본은 조선의 모든 정보를 얻는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반도 침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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