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현의 인문산책] 남들이 은퇴할 때 시작한 황희,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박기현의 인문산책] 남들이 은퇴할 때 시작한 황희,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 박기현
  • 승인 2020.06.30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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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의 나이면 지금도 은퇴하고 남을 나이다. 이 늦은 나이에 오히려 정치를 새로 시작한 인물, 그가 바로 세종의 오른팔 황희다. 흔히 사람을 구분할 때, Task-Oriented(과업 중심형) 인재인가, 혹은 People, or Relation-Oriented(인간, 관계 중심형) 인재인가를 따지게 된다. 대부분의 유형은 이 둘 중 한 가지에 해당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희는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황희의 리더십을 오늘의 시각으로 살펴본다.

촌로에게 소통과 포용 의미를 깨닫다

황희 초상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황희 초상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황희는 고려 말기 말단 관직으로 일하면서 개성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촌로를 만났다. 그는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를 이끌고 밭을 갈다가 잠시 쉴 참이라 황희도 그 옆에 앉아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문득 황희가 물었다.

“노옹의 두 마리 소 중에 어느 소가 더 일을 잘 합니까?”

그러자 노인은 옆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낮은 말소리로

“이 소가 낫고 저 소가 못하오.”

라고 말하였다. 황희가 소가 들을까봐 걱정하는 노인을 기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짐승이라도 사람 말의 좋고 나쁜 것은 다 알아듣는다오. 만약 제가 못나서 남만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에 불평스런 것이 어찌 사람과 다르겠소?”하였다.

그는 평생 이 가르침을 잘 새겨 함부로 남의 말을 하지 않고 꼭 새겨들으며 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대했다. 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상대가 누구이든, 그 마음을 얻으려 했고 귀 기울여 들으려 했기 때문에 황희를 가리켜‘소통과 포용의 대가’라고 불렀다.

집현전은 정치와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려던 세종의 싱크탱크였다. 이곳 출신 학자들은 학문의 수준도 높았지만 그만큼 긍지가 강하고 고집도 세서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을 잘 관리하고 군주와 의사소통을 주관해야 하는 자리에 황희가 낙점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리더쉽과 펠로우십을 확실하게 선보였다. 펠로우십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 안에서 목표를 실현해 가는 것이다. 즉, 출신 배경과 철학과 사상이 다른 집현전 학사들을 한데 모아 세종의 싱크탱크로 만들어낸 것은 황희표 리더십과 펠로우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의견이라도 존중하고 들어주는 황희의 따뜻한 가슴이 날카롭게 날이 선 집현전 학자들의 고집과 프라이드를 부드럽게 품어내 세종이 원하는 문화정치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황희가 이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것을 보고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무려 18년간이나 영의정의 자리에 머물게 하였다. 황희의 리더십이 인정받은 것이다.

능력위주의 인재 발굴과 막강한 네트워크 조선은 경직된 관료사회였지만 그 속에서 황희는 능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펼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무인집안 출신의 학자 성삼문, 관노 출신의 장영실 같은 과학자들, 문인 출신이지만 무장으로 이름을 더 날린 김종서 등이 세상에 빛을 본 것도 황희 덕분이었다. 이처럼 황희의 정보력은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 황희는 2개의 왕조에서 4명의 군주가 교체되었음에도 살아남아 그가 만난 많은 능력있는 인재를 치우침 없이 발굴하고 추천했다. 세종은 황희의 이런 인적 네트워크를 중요시했다. 그만큼 황희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강온 양면 갖춘 설득의 대가

그는 평소에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사실은 강온 양면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고 때로는 엄하고 추상같은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그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당시 병조판서가 된 김종서가 여러 정승과 대감들 앞에서 의자에 비딱하게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자 황희는 문밖의 시위를 불러“병판 의자 다리가 한쪽이 짧은가 보니 와서 손질해 드려라!”고 지시했다. 깜짝 놀란 김종서는 놀라서 자신의 무례함을 빌었다. 또 한 번은 정승들의 회식 때 재정을 낭비했다 하여 김종서를 크게 나무라자 주변에서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황희를 말렸다. 그러나 황희는“김종서니까 내가 더 말하는 겁니다. 사소한 일일수록 잘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시중에‘김종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여진족을 잡고 황희는 호랑이 장군을 잡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세종과 황희는 나라의 힘을 키워야 적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국경을 재정비하고 군대의 규율과 제도를 점검했다. 남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함경도 지방에는 육진을 설치하며 여진족들을 귀화시켜 남침을 예방토록 하였다. 최윤덕과 김종서가 나서 이룩한 북방 4군 6진의 개척이 이루어져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국경선이 정비되었고 한동안 왜구나 여진족들이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황희의 돋보이는 점은 이러한 세종의 국방 경제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지원하며 자신이 직접 함경도와 평안도 등 현장에 나가 목소리를 듣고 돌아오곤 했다는 점이다. 리더란 현장을 확인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황희는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켰던 것이다.

군주의 참모역 확실히 구현한 리더

세종은 완벽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고 줄기차게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황희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었다 잡아당겼다 하며 완급을 잘 조절하도록 세종을 유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군주의 권위를 넘어서지 않았으며 군주의 뜻을 잘 파악해 18년간이나 보필한,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준 참모 중의 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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