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국제뇌물방지법을 아시나요?
[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국제뇌물방지법을 아시나요?
  • 장대현
  • 승인 2020.04.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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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국내 대기업인 S건설 현직 임원인 이 모 전무가 구속됐다. 평택 주한미군기지(Camp Humphreys) 공사에서 미군 관계자에게 뒷돈을 건넨 혐의였다. 앞서 검찰은 S건설이 미 육군 계약담당자였던 N씨에게 300만 달러(약 32억 원)를 건넨 정황을 포착해 S건설 본사를 압수 수색을 했다. 검찰은 이 전무가 국방부 중령 출신 이 씨가 운영하는 하도급업체를 통해 회삿돈을 비자금으로 세탁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보았다. 검찰은 하도급업체 대표 이 씨도 배임수재 혐의로 함께 구속기소 했다. 이 전무에게 적용된 혐의는 해외뇌물과 횡령, 자금세탁 등이었다. S 건설은 N 씨에게 뒷돈을 건넨 대가로 2008년 미군이 발주한 공사를 4,600억 원에 단독 수주할 수 있었다.

장대현 한국컴플라이언스 대표

이 전무가 구속된 지 1년이 되어갈 무렵, 미국 법무부(DOJ)는 이 전무와 S건설의 또 다른 임원인 이 모 상무를 미국 정부에 대한 사취(詐取, defraud)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미국 법무부가 법원에 제출한 기소장(indictment)에는 S건설 두 임원의 실명이 나온다. 미국 법무부는 피고인들이 미국 정부 조사를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두 임원은 S건설 직원들에게 관련 서류 상자를 불태우게 하고, 증인을 회유한 혐의도 받았다. S건설 두 임원이 모두 한국에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데도 미국 정부가 기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2019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전무에게 징역 4년 실형과 벌금 2,000만 원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하도급업체 대표 이 씨에게도 징역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하고, 추징금 12억 6,500여만 원을 명령했다.

S건설로부터 돈을 받은 N 씨는 2017년 9월 미국 현지에서 붙잡혀 연방 검찰에 기소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무에게 적용된 법 중 하나는 ‘국제뇌물방지법’이다. 제정된 지 오래되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법이다. 이 법은 전체 조문이 5개 밖에 없는 ‘초(超) 미니(mini) 법’이다. 내용보다는 제정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OECD 협약 가입국들은 대부분 해외뇌물을 규율하는 법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과 영국 뇌물방지법(Bribery Act)이다. 그중 미국 FCPA는 워트게이트 스캔들(Watergate scandal) 이후 1977년 제정되었다.

FCPA 역외적용이 활발하지 않던 1980~1990년대에 미국 기업들은 FCPA로 인해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 기업들과의 국제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FCPA가 미국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강한 불만이 제기되자, 미국은 OECD를 움직였다. 결국 미국 주도하에 국제상거래에서 뇌물제공을 범죄로 규정하기로 한 최초의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OECD 뇌물방지 협약’이 탄생한 것이다. OECD 회원국 등 33개국이 이 협약에 서명하고 발효되었다.

한국은 국내 이행을 위해 1998년 12월 ‘국제뇌물방지법’을 제정했다. 해외뇌물죄를 다루는 유일한 근거법이다. 이 법은 뇌물 제공자만 처벌한다. 따라서 뇌물을 받은 외국 공무원은 그가 속한 나라의 국내뇌물죄로 처벌된다.

이 법은 형법과 달리 뇌물을 제공한 임직원뿐만 아니라 그 임직원이 속한 법인도 처벌할 수 있는 ‘양벌규정’을 두고 있다. 이는 국제뇌물방지법이 OECD 뇌물방지협약을 국내법으로 도입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국제뇌물방지법 제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법은 미국 FCPA다. 미국 정부는 최근 공격적으로 FCPA를 적용하고 있다. 특히 역외적용이 활발하다. 최근 고액 벌금 납부기업 명단을 보면 대부분 외국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미국 연방항소법원이 미국 정부의 역외적용 확장에 제동을 걸 정도다.

이러한 법 집행에는 미국 국력과 현 행정부의 보호주의적 성향도 작용했다. FCPA는 미국 법무부가 거둬들이는 각종 징벌 금 중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 내에서도 미국 정부의 ‘현금인출기(ATM)’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한국은 미국과 같이 외국회사에 대한 적용은 아직 시도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제뇌물방지법이 일부 개정되어 5월 5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네 번째 개정이지만 이번 개정은 의미가 크다. 특히 벌금형 상한을 ‘2,000만 원 이하’에서 ‘5,000만 원 이하’로 올렸다. 물가 상승 등의 경제적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벌금 상향에도 불구하고 처벌은 여전히 약해 보인다. 이러한 법 개정 노력은 OECD 권고사항에 기인한다.

OECD는 ‘뇌물방지작업반(Working Group on Bribery)’을 운영하여, 1999년부터 각국의 뇌물방지협약 이행상황을 점검해 왔다. 지난 2018년 12월 뇌물방지작업반은 한국의 협약 이행에 대한 4단계 평가 결과를 공개했다.

OECD는 한국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해외뇌물 사건 수사 실적이 3단계 평가 이후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법집행기관의 역량 강화를 통해 적극적인 해외뇌물 사건 적발과 수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제뇌물방지법은 20년 역사에 비교해 그 집행실적은 너무 초라하다. 좋은 취지의 법도 집행이 없으면 사문화(死文化)되고 만다. 외국 집행기관은 반부패의 칼을 빼 들고 부패한 기업의 목을 겨루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솜방망이 수준이다. 이러다가는 국내 기업들이 부패 사냥에 나선 외국 정부의 먹잇감이 될지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해외뇌물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선제적(先制的)인 처벌은 국내 기업들에 오히려 약(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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