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동국제강 ‘不爭의 원칙’ 신통(信→通)한 노사화합 정착
[특집기획] 동국제강 ‘不爭의 원칙’ 신통(信→通)한 노사화합 정착
  • 김종대
  • 승인 2020.02.2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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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으니까(信賴) 소통(疏通)과 화합(和合)이 이루어졌다”
동국제강 노조 ‘항구적 무파업’ 선언 26년간 손발 척척
박상규 현 노조위원장 노조문화 유산 수성 '철벽 리더'
장상태 장세주 회장 장세욱 부회장까지 노사화합 뼈대 지켜

“부모와 자식간에 계약서를 써야 하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들이 장가가는데 집을 사주겠다고 했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약속을 지켜 달라고 계약서를 받아야 하느냐는 말일세.”
“그런 일은...없지요”

“노사관계도 父子간의 신의를 근본으로 해야 하네.”
“여러 방도로 고민하겠습니다.”

“회사는 노조에게 모든 경영상황을 공개토록 하세요. 노조의 요구는 경영층이 보지 못하는 실수를 찾아내기도 하잖아요....”

노조는 경영 참모이다. 1980년대 후반에 장상태 전 동국제강 회장(2000년 4월 작고)이 한병주 회장실장(전무)과 나눈 대화의 일면(송원경영어록 참조)이다. 특이점은 ‘노조를 경영 참모로 삼으라’는 의외의 주문이다.

동국제강은 창사 이래 단 두 번의 노조 파업이 있었을 뿐 더 이상의 노사분규는 없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동국제강 노조는 회사의 권유로 창립(1987년)됐다. 동국제강 노조는 1994년에 ’항구적 무파업‘이라는 노사화합의 결정판을 세상에 발표했다. 그리고 26년 동안 단 한 번도 쟁의를 하거나 임금협상을 위한 투쟁 없이 ’무교섭‘으로 임금 협상을 매듭짓고 있다.

초대 노조위원장으로부터 오늘의 박상규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무파업이란 노사화합의 유산’을 역대 노조위원장 모두가 잘 지켜낸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믄 일이다.
 

장세욱 부회장은 매년 임직원들을 대동하고 자매부대인 2사단 노도부대를 위문차 방문한다. 지난해 여름 방태산을 트래킹한 후 장세욱 부회장(좌)과 장광선 2사단장(우). 동국제강의 노사화합문화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접목되고 있다.
장세욱 부회장은 매년 임직원들을 대동하고 자매부대인 2사단 노도부대를 위문차 방문한다. 지난해 여름 방태산을 트래킹한 후 장세욱 부회장(좌)과 장광선 2사단장(우). 동국제강의 노사화합문화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접목되고 있다.

 

우리는 영원히 파업을 안 합니다

동국제강 노사화합의 핵심은 ‘항구적무파업 선언이다.’ 이 회사 노조는 어떻게 법으로 인정한 쟁의를 스스로 포기한 것일까? 반대로, 회사는 임직원들을 어떻게 보살폈기에 노조로부터 신뢰를 얻은 것일까?

강성 노조의 파업은 필연적으로 비효율을 동반한다. 1980년대에 주 32시간만 일하겠다고 총 파업을 벌였던 독일 철강회사들은 모두 몰락했다. 철강왕 카네기도 주력 생산 기지였던 홈스터드공장에서 임금 인상을 외치는 노조원들을 향해 발사한 총격사건으로 철강왕의 칭호를 내려놨다.

높은 임금만을 목표로 하는 거친 노사 분규의 결론은 공장 폐쇄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았다. 전 세계를 주도했던 미국의 철강기업들은 높은 임금 투쟁에 밀려 설비 합리화의 타이밍을 놓쳤고, 제3자에 매각되거나 공장이 폐쇄되는 수순을 밟았다. 피츠버그에서는 더 이상 시큼한 철강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다.

임금 인상만을 외치는 거대 노조는 제조업과 노조원들의 삶을 책임지지 못했다.

파업 없이도 실질이익을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동국제강 노조가 선언한 ‘항구적 무파업’은 솔로몬의 현명한 선택과도 같다. 그 선택을 결단한 이는 철강공장의 업무과 장비반에서 지게차. 크레인 운전을 하면서 노조 사령탑에 올랐던 서복호(당시 38세)라는 인물이다.

그가 ‘항구적 무파업’을 전격적으로 선언한 이유는 간단했다. “파업을 하지 않더라도 근로자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잦은 파업 때보다 오히려 파업하지 않고 노사문제를 풀어 나갔을 때 근로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간다면 파업의 필요성이 없는 거죠.”

그렇다면 동국제강은 노조에게 어떤 화답을 했을까? ‘조용한 협상’과 직원 사랑이 전부였다. ‘조용한 협상’을 통해서 지난해 보다 2배나 많은 성과급의 지급을 결정했다.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경영층과 사무직원들은 현장근무자들의 불편을 함께 해결해 나갔다. 그중에는 오너의 통 큰 배려도 있었다.

“성과급은 많은데 세금 때문에 별로 남는 것도 없다.”는 직원들의 불만을 우연히 알게 된 장상태 회장(당시 회장)은 “세금에 해당하는 만큼 성과급을 더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노조는 무파업을 선언하고 회사는 파격적인 성과급을 지급하고, 동국제강 노사의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 이유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소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원 없고 소소한 개인문제도 해결

동국제강 노조가 항구적 무파업을 발표한 표면적인 이유는 인천공장에 직류 전기로를 설치하고 포항 1후판공장을 준공한 이후에 불어 닥친 오일 쇼크로 재고가 쌓였기 때문에 현장근무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원의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이때 회사 측은 고용보장을 노조위원장에게 통보했고, 노무 담당부서는 보이지 않는 노조원들의 불편함을 지원해 나갔다. 사원 개인은 물론 가정의 대소사까지 챙겼다. 자녀문제와 경조사 개인의 법률 자문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문제들을 노무담당부서에서 해결해 주었다.

좋은 일은 노조가 맡고, 궂은일은 회사가 맡아서 해주는 식이었다. 특히 매월 1회 실시되는 책임경영회의에 노조집행부를 참석 시켰다. 회사의 경영상황을 알리고, 불황으로 회사가 어려워도 자연 퇴직 인원을 충원하지 않는 선에서 감원을 없앴다. 이런 소소하지만 확실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회사가 나서서 해결하자 신뢰를 갖게 된 것이다.

노사화합에는 모든 것이 순탄할 것만 같은 동국제강의 역사 속에도 폭력이 난무하는 노조쟁의가 오점으로 남아있다.

쇠파이프로 무장한 폭력파업

동국제강 부산공장 파업/사진=조선일보 자료 캡처
동국제강 부산공장 파업/사진=조선일보 자료 캡처

1980년 4월28일 밤 10시경. 300여 명의 현장 근무자들은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농성 대열은 1,000여 명. 이들은 임금 40% 인상, 상여금 400% 지급, 공상자 임금100%인상 등을 요구했다.

다음날 파업 참여자들은 회사 사무실(인사 기록 카드와 경리 장부 보관 장소)과 계근실(철강재 입출하시 계량하는 장소)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당시 사장이었던 장상태 씨는 계근실이 불타는 장면을 부산공장 정문 너머에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밤 8시 45분경 농성자들은 거리로 나섰다. 기동 경찰 850명과 7대의 소방차가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농성자들은 돌멩이, 쇠파이프, 각목으로 대항하며 경찰과 맞섰다. 농성이 풀린 것은 밤 11시 50분경이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8명이 연행됐다. 6명은 구속되고 2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경찰은 농성 주동자가 위장 잠입한 운동권 학생들이었다고 밝혔다. 농성은 임금 30% 인상안으로 합의하고 마무리 되었다.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부산공장장이 파업을 주도한 무력 노동자의 쇠파이프 폭력을 피하기 위해 담사이로 도피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동국제강의 두 번째 파업(1991년)은 적법절차에 따라 10일간 농성한 것이 전부였다.

뿌리내린 ‘부쟁의 원칙’

현재 동국제강 노조는 박상규 위원장이 이끌고 있다 그는 어느 위원장보다도 우여곡절을 잘 극복해온 위원장이다. 그는 1~2년 단위로 급격히 변화하는 경기 변화 때문에 노조원들에게 충분한 성과급의 지급이나 임금 인상안을 회사 측에 제시하기가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동국제강의 노조 본조가 인천공장으로 이전되면서부터 박상규 위원장의 진가가 나타난다. 그는 인천공장 압연파트로 입사한 이래 일찍부터 김재업 전임 노조위원장을 보좌하면서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현장 구석구석의 진자리 마른자리를 찾아다니며 현장 위주의 노조지원 정책을 착실히 수행했다.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 할 당시에도 그는 인천공장에서 자신의 의견과 지혜를 총 동원시켰다.

말하자면 서복호 전 노조위원장이 ‘항구적 무파업 선언’을 이끈 당사자라면 현재의 박상규 위원장은 ‘무파업’이란 노사문화 유산을 수성해 낸 철벽같은 리더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려운 법이다. 지금과 같이 철강경기가 어려울 때 노조위원장의 고뇌는 깊어갈 수 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도 박상규 노조위원장은 수년째 무교섭 임단협을 마무리 지었다. 회사로부터 얻어낸 것은 노조원들의 안정된 일자리였다. 그는 항상 회사와 노조가 함께 살 수 있는 노사 양측의 윈윈을 선택했다고 주변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런 무분규의 전통이 자리 잡힌 원동력은 동국제강 기업문화 속에 뿌리내린 ‘부쟁(不爭)의 원칙’이 중심을 잡고 있다.

동국제강 고 장상태 회장이 즐겨 말하던 노자의 ‘부쟁(不爭)의 원칙’은 현 장세주 회장과 장세욱 부회장으로 바통터치 되면서 동국제강 곳곳에 정착됐다.

맏형 같은 훈훈한 배려

장세주 회장의 직원 사랑은 맏형의 모습과 닮았다. 동국제강 노조가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할 당시 장회장(당시 전무)은 직접 노조집행부와 밤샘 맞짱 토론을 벌였다. 그는 신입사원 시절 현장 근로자와 함께 족구를 즐기면서 친화력을 높였다. 뜨거운 빌렛(철강 중간소재) 위에서 끓인 라면을 현장 근로자들과 나눠 먹을 정도로 현장 친화적인 오너이다.

이 과정은 현장 근로자들의 애로사항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됐고,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생산 현장을 우선 배려하는 경향을 보였다. 장회장은 IMF시기에 과장급 이상의 임직원이 스스로 제출한 사표를 반려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임직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지요. 현장 직원들도 불안에 떨고 있다던데. 그냥 갑시다. 이 엄동설한에 가족들을 거리로 내몰아서는 안 됩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사는 방안을 마련해야지요. 아버님께는 제가 말씀드리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튿날 조직 슬림화는 없던 일로 됐다.

장회장은 인재양성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지방대학 출신이 많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2등을 1등으로 만든다”면서 경영대학원에서의 공부기회를 대폭 늘렸다. 연세대 상남경영대학원과정에 1회 30명씩의 인원을 차출하여 대부분의 관리직 사원들이 대학원과정을 이수토록 했다.

안식월 제도도 장회장의 지시로 이뤄졌다.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휴식을 통해 재충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제도는 해외연수로 발전되었다. 물론 급여이외의 별도 경비가 지원됐다.

“아직 비행기도 못 타봤다”는 현장근무자의 말을 들은 장회장은 1인당 150만원 규모의 비용을 들여 1년에 두 차례씩 일본에 갈 수 있도록 했다. 1987년도에 시행된 이 제도는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현장근로자들의 임금 수준과 살림 형편을 노무팀장으로부터 전해들은 장세주 회장은 “한 사람이 벌어서 생활이 언제 윤택해 지겠나. 가족 모두가 합심해야지. 각 공장에 사무 보조를 채용할 때 현장근로자 자제를 가급적 많이 채용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어느 공장에는 일가 친척 11명이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진풍경이 발생하기도 했다.

번개팅으로 전사원과 미팅

장회장의 친 동생인 장세욱 부회장은 적어도 일주일에 두 세 차례는 생산 공장 현장을 깜짝 방문한다. 그의 백팩에는 자비로 구입한 전자제품과 요긴한 선물이 들어있다. 그것들은 사원들과의 번개미팅 때 나눠 주려는 선물들이다. 그의 책상 위에는 전사원들의 명단이 적힌 사내 전화번호가 놓여있고 사원의 이름위에 형광펜으로 색칠한 곳이 많다. 색칠된 명단은 이미 한번 이상 중식이나 석식을 같이 한 사원들이다.

그는 추운 겨울날 아침 회사 정문에서 출근하는 임직원들에게 “추운데 어서 오시게”라면서 목도리를 걸어 주는 자상함도 보였다. 또 출근길에 신입사원의 집으로 마중을 나가 자신의 승용차로 함께 출근을 한다거나 중식시간을 이용한 번개 점심을 자주 한다. 동국제강 직원 일부는 그런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기도 한단다.

동국제강의 관리자들도 공장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현장 근무자들을 찾는다. 그들과 직접 업무를 협의하고 술추렴도 같이 한다. 아버지뻘의 기장과 기술직 엔지니어의 만남이 하나도 어색치 않다고 한다.

노조가 됐든 관리직 사원이 되었든, 동국제강에서 투쟁이란 단어는 금기시 된다. 대신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무교섭이란 새로운 노사화합 전통으로 만들어 냈다.

믿으니까 소통이 된다

“믿으니까(信賴) 소통(疏通)과 화합(和合)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동국제강 임직원들이 자부심으로 삼고 있는 기업문화이다. 그 근저에는 형제경영이 녹아있다.

동국제강의 형제 우애경영은 재계에 잘 알려져 있다. 동국제강은 3대째 형제간의 다툼이 없는 기업이다. 장세주 회장은 큰 틀의 미래경영을 맡고, 동생인 장세욱 부회장은 동국제강을 직접 경영하면서 ‘소통’과 ‘부국강병’을 경영키워드로 삼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선대의 가르침이었던 ‘부쟁의 원칙’를 실천하는 일단이다.

“우리는 철강 빅3이지만 노사화합은 1위 기업이다.” 이 말의 참 의미는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치더라도 노사화합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 할 수 있다는 동국제강 임직원들만의 무한 자원이다.

신통(信→通)한 동국제강의 노사 문화는 고 장상태 회장으로부터, 장세주 회장, 장세욱 부회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통(信→通)한 동국제강의 노사 문화는 고 장상태 회장으로부터, 장세주 회장, 장세욱 부회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사화합의 위력은 기업이 위기일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2014년도부터 경영상황이 악화되면서 채권단과의 재무구조 약정을 진행해왔던 동국제강이 계열사 매각, 사옥 매각, 2후판공장 가동중지 등 모진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현장직 근무자들을 밖으로 내 몰지 않았고, 임직원들은 급여를 자진 반납하는 초강수를 두어 경쟁력을 다시 회복했다. 모두 선대의 ‘오래된 약속’인 ‘신뢰’를 노사가 합심해서 지킨 결과였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장수기업의 조건’이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장수기업들은 ‘사람’을 중시하는 풍토가 유별나며, 이는 노사관계에서 잘 나타난다고 했다. 삼양사·유한양행·아모레퍼시픽·동국제강 등에는 ▲강한 일체감 ▲고용안정과 직원에 대한 투자 ▲개인 고충 해결 노력 ▲노사 동반자 문화 등이 특징이라고 보고서는 지목하고 있다.

철강기업 중 주인이 바뀌지 않고 3대째 영속하고 있는 동국제강에 춘투의 계절이 오면 ‘인간적이고 가족적’인 화음이 새어 나온다. 2500여명의 임직원들이 부르는 ‘노사화합’의 노래이다.동국제강은 올해도 무교섭으로 임단협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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