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태만상] 세계를 주름잡은 정화선단
[철태만상] 세계를 주름잡은 정화선단
  • 김종대
  • 승인 2020.01.23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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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무렵, 중국의 해운산업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영락대제의 명을 받은 환관 정화(鄭和)는 7차례에 걸쳐 멀리 인도 캘리컷과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이슬람권까지 진출했다. 가져간 금, 은, 동전, 도자기, 견직물은 인도의 향료, 중동 아프리카의 옥, 상아, 코뿔소 뿔(약재) 등으로 바꾸었다. 정상적으로 국가간 교역을 한 것이다.

정화는 첫 출항 때 대선박 62척에 승선원 2만7800명을 실고 떠났다. 3회 때는 선박 48척과 2만7000명, 7회 때는 2만7550명이었다. 엄청난 규모이다.

정화의 대규모 무역선이 해양 실크로드를 따라 실행되었는지는 “캘리컷항에 13척의 중국배가 들어와 있었다”는 이슬람 지리학자 바투타의 글로 증명됐다.

과연 400명 이상이 탈만한 대형선박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1957년 남경 교외에서 84톤급(길이 150미터, 폭 62미터)의 보물선 키가 발견됨으로써 과장된 수치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해운산업에 대한 리더들의 개방적인 세계관은 국가의 미래를 선진화 시킨다는 것을 역사는 알려주고 있다. 그 이전에는 반드시 철강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으로서의 충분한 밑거름 역할을 해야 했던 일도 간과할 일이 아니다.

“배는 원래 바다에 있어야 할 것이다. 해도를 따라서, 혹은 해도 없는 미지의 항로에서, 폭풍 속에서, 찌는 듯한 태양 아래서, 눈보라가 치는 북극에서, 배는 숨 쉬고 땀을 흘리고, 헐떡이면서 일을 해야 한다. 먼 나라의 항구로 재화를 나르고, 여러 가지 꿈과 야심과 슬픔을 지닌 손님을 날라야 할 것이다”

소설 ‘회색인’에서 최인훈은 선박의 역동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야 한다. 과거 중국의 정화선단처럼 한국의 해운업은 오대양 육대주를 다시한번 마음껏 누빌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해운산업은 국가 비상시에 전략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막중한 산업이므로 지쳐가는 해운산업을 이대로 나두면 연관산업 마저 고통을 겪는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볐던 한국 해운사들이 ‘피겨 여왕 김연아의 화려한 귀환’처럼 세계 해운시장에서 당당하게 코리아의 깃발을 펄럭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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