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현의 인문산책] 그 많던 조선 수군은 어디로 갔나?②
[박기현의 인문산책] 그 많던 조선 수군은 어디로 갔나?②
  • 박기현
  • 승인 2019.05.1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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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앞선 첨단 함선 건조 기술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임진왜린기의 판옥선-나무위키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임진왜란기의 판옥선-나무위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중신들이 워낙 전쟁에 대비하지 않고 있었기에 개천 초기 경상좌우수영의 선박들은 초전에 제압당하여 전투에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은 유비무환의 준비를 위해 판옥선을 250척 까지 늘린다는 계획 아래 열심히 함선 건조를 하는 한편 수전 전술 훈련을 계속해 왔기에 전쟁이 터졌을 때 전라좌수영 함선들만은 건재할 수 있었고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쟁의 승기를 잡게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이순신의 거북선을 앞세운 돌파작전과 기습, 포위작전의 능력은 후일 일본 최고 해전가라고 평가받은 바 있던 도조 원수로부터 ‘넬슨을 넘어선 세계 최고의 전술가이자 해장’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사상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 당시 세계 해군사를 살펴보면 조선 수군의 수준은 최상급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문제는 거기까지밖에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것처럼 전국 해안을 물샐틈없이 방어하고 적의 침입 시에는 기동선단을 내보내 궤멸하게 만들던 조선 수군이 점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화가 계속되면서 증강된 수군을 유지하는 것이 점차 힘에 겨워졌던 것이다. 이에 수군의 함선을 평상시에 물류 이용이나 병력 이용에도 쓰고자 병조선이라는 함선 운영방식이 도입되었다.

장부상 숫자 많고 기술은 15세기 것

이런 평화적 이용이나 선박 수치의 유지는 영정조 시절에도 그런 대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내용을 볼라치면 선박을 이용할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수군을 지원하지도 않고 나갔어도 탈영하거나 복귀하지 않아 전력 손실이 장부와 현실상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는 점이다.

더 큰 판단 착오는 영정조 황금기 시절, 수군 발전은 뒤로 밀려 나가 있을 때 서양은 증기로 배를 움직이는 기술을 이미 도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수군의 쇠퇴는 임금과 지도부 층의 전적 판단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조선 초부터 육지 방어를 기본 정책으로 삼았고 바다에 나가는 것을 반역행위로 금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펼쳤으니 발전이 올 수가 없었다.

여기에 전통을 좋아하고 답습하며 안주하려는 보수적 의식이 더 큰 문제였다. 현대의 해군 과학자들은 조선 수군의 해전능력과 전함 건조 능력이 이순신 장군 시절 이후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지도부가 조선 수군을 최강으로 착각하고 장부상으로만 유지하던 실책이 조선의 국방력 저하를 가져왔고 급기야 서양 이양선 앞에서 500척이 된다던 조선 수군의 선박 가운데 한 척의 배도 제대로 전투능력을 갖추지 못해 상대가 안 되는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수군을 장부로만 관리하는 어리석음으로 일본의 야욕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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