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현의 인문산책] 치수로 태종을 보필한 하륜
[박기현의 인문산책] 치수로 태종을 보필한 하륜
  • 박기현
  • 승인 2019.12.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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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 홍수...태종에 건의 개천도감 설치
둑방을 돌로 쌓는 수방책 마련...청계천 등장

조선조 5백년 동안의 틀 잡기와 기반 마련은 태종의 책사 '하륜'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대단히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교만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태종의 뒤에 서서 부창부수의 리더십을 선보였다. 하륜은 신생 조선의 제도와 법질서, 행정의 체계적 운영을 실현한 전형 적인 관료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풍수와 치수의 대가로, 한편으로는 청계천, 태안반도, 한강 등의 치수를 기획하고 실현한 현장형 지도자이기도 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수년간 6~7월이면 장맛비가 내리면서 인왕산 북한산에서 내려온 빗물과 도심 개천의 빗물이 합쳐지며 서울이 물구덩이가 되는 일이 번번했다. 게다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궁궐과 민가가 크게 늘어나 물길이 한데 몰리는 바람에 경복궁 앞까지 물이 차오르는 물난리를 겪었다. 실록도 태종 7년 7월초에 큰 비가 내려 서울도심의 개천이 모두 넘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조선왕국 건설 후 계속 되는 홍수에 골머리를 썩였다. 이를 고민하던 태종에게 하륜 등 신료들은 개천 준설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태종은 왕명으로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비교적 풍년이든 경상도 전라도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둑방을 돌로 쌓으며 홍수에 대비한 수방책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청계천이다.

청계천의 옛 이름인 ‘개천(開川)’을 소개하는 ‘천하도(天下圖)-한양도(漢陽圖)’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청계천의 옛 이름인 ‘개천(開川)’을 소개하는 ‘천하도(天下圖)-한양도(漢陽圖)’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러나 강제로 끌려온 백성들과 가족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하고 패기 넘치는 왕이었으나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태종은 신료들에게 이를 걱정했다. “해마다 장마 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 낮으로 근심이 되어 개천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 이번 이 일(청계천준설)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는가?”

그러나 하륜이 직접 나서서 청계천 준설은 수도안정과 방비 및 국가의 장래에 꼭 필요한 옳은 일이니 멈추지 말고 진행하자고 독려했다. 하륜은 물길을 안정시키지 않고는 정국의 불안정을 해소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가뜩이나 해마다 일어나는 홍수 때문에 개성에서 시작한 조선 왕도를 괜스레 왕기가 쇠한 곳으로 이전하여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느니 어쩌니 하는 불평들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망국 고려의 유신들이 공공연하게 피로 일어난 나라는 피로 망 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흘리고 다녔다.

민심을 잠재우지 않고 왕국의 미래를 안정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하륜의 생각이었다. 결국 장의 동(藏義洞) 어귀로부터 종묘동(宗 廟洞) 어구까지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昌德宮)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고, 대·소광통(大小廣通)과 혜정(惠政)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신화방(神化坊) 동구(洞口) 등의 다리[橋]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쓰는 대규모 토목사업 끝에 청계천이 완성되었다.

1412년 2월 15일의 일이었다. 동원된 군사만 5만2800명이었고 공사기간 중에 죽은 자는 64명이나 되었다. 오늘의 청계천은 그때 시작된 것이니 600년 인고의 세월을 간직한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그 청계천은 말도 많았다. 준설 한 후에도 큰물이 넘쳐 홍수가 나는가하면 태종 18년에는 표범이 청계천에 나타나 사람들이 악전고투 끝에 잡아 병조에 넘겨주는 일 도 벌어졌다. 그러나 수표를 세우고 물길을 측량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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