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현의 인문산책] 독서력으로 동아시아 흐름을 꿰다②
[박기현의 인문산책] 독서력으로 동아시아 흐름을 꿰다②
  • 박기현
  • 승인 2019.10.30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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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에서 자주 밤샘독서, 세종은 돈피 갖옷 덮어줘
조선초 외교정치사 디딤 역할

세종이 발굴한 최고 지식인 신숙주

세종은 신숙주를 깊이 신뢰하여 집현전 학사의 최고영예인 직제학으로 제수했다.

신숙주의 학문적 열정은 지독한 독서광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어릴적부터 경서에 탐독하여 일곱 살에 이미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글을 한 번 읽고 나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집현전에 들어간 24세 때부터는 실력이 일취월장 발전했는데 그것은 장서각에서 귀중한 서책을 마음 놓고 볼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서에 대한 신숙주의 집념과 열정은 숙직을 도맡아가며 장서를 읽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세종은 그가 독서광이라는 소문을 듣자 확인 차 내시를 시켜 모습을 엿보게 했는데 그는 첫 닭이 울고 나서야 책을 덮고 잠이 들었다. 세종은 이를 듣고 자신이 입고 있던 돈피 갖옷을 벗어 신숙주에게 덮어주라고 명했을 정도였다.

신숙주의 독서 버릇은 그가 웬만큼 술이 취해도 반드시 자다가 깨어 글을 읽고 다시 잠들 정도였다.

세종은 이때부터 신숙주를 신뢰하여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 투입시켰고 한글 운용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한글창제 작업에 투입된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 하면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교통이 너무도 불편한 요동 땅을 13차례나 현장 답사하는 열성을 보였다.

결국 <용비어천가> 등의 한글 사용도 신숙주의 작품이었고 음운 번역이나 고(古)제도 연구도 자연스레 그의 몫이 되었다. 조선 궐내에서 신숙주를 능가할 학사는 아무도 없었고 동아시아에서도 그는 발군의 학자였다. 그는 문신이면서도 세조에게 북방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여진 정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야전부시도
야전부시도

그는 1460년(세조 6년)에 동북 방면으로 자주 침입하는 중국 동북부지방의 여진족의 토벌책을 제시하고, 같은 해 7월27일에 강원·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宣慰使)로 임명받아 북방 오진(五鎭)에 이르러 강을 건너가 여진족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고 개선했다.

세조는 이 정벌을 기록으로 남겨두라고 왕명을 내려 신숙주가 1461년(세조 7)에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한 바 있고, ‘야전부시도’라는 그림에도 기록으로 남았다.

그는 이후 예종 성종을 거치며 모두 6명의 군주를 모시고 경륜을 폈지만 결코 게으름 한 번 부린적 없이 쉼 없는 열정으로 치열하게 일하다가 1475년 예순이 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신숙주는 세조의 왕위찬탈로 비록 명분은 잃었지만 조선 초기의 문화와 외교정치사에 중요한 디딤돌을 만들어 세조의 오명을 씻어준 세조의 진정한 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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