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은의 의학이야기] '오징어 게임'을 해석한다
[김해은의 의학이야기] '오징어 게임'을 해석한다
  • 김해은
  • 승인 2021.11.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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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은 한사랑의원 원장  (대한의사협회 정책자문위원)
김해은 한사랑의원 원장 (대한의사협회 정책자문위원)

인터넷 전용 영화회사에서 만든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관심사다. 드라마를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현상을 대비해보고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해본다. 무엇이 세계인을 드라마에 빠져들게 하였는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큰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드라마 속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암시가 공감대였기 때문에 시청자는 궁금증에 빠져들었다.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는 오일남 노인이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힘없는 노인으로 출연하지만 실은 게임 속에서 신과 같은 존재다. 게임을 직접 설계하였고 게임 속에 참여하여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한다. 첫 게임에 혼란에 빠져 당황한 참가자들에게 모범을 보여 살아서 게임에 참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줄다리기에서는 게임에 이기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저마다 살기 위하여 속고 속이는 구슬치기 게임에서 그나마 인간미가 남아있는 쌍문동 아저씨 성기훈을 살리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그리고 게임의 말미에 살아서 나타나 혼란에 빠지게 하더니 너무 심심해서 게임을 계획하고 즐겼노라고 주인공을 분노하게 만든다.

오징어 게임의 무대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섬이다. 외부의 시선과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닫힌 세계이다. 무한히 넓은 열린 세계에 산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상 우리는 닫힌 세계에 국한되어 살고 있다. 대한민국, 서울, 쌍문동에서 공동체에서 정한 Rule에 따라 제한적인 삶을 살고 있다. 복잡하게 얽힌 인간사의 모든 사회적 현상을 인수분해하면 결국 의식주 그리고 생식으로 국한된다. 제한된 수명을 살다가 가면서 형용사와 동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가지만 부사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오일남은 자신이 만든 닫힌 세계에 부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사회의 루저들을 초대한다.

사회의 경쟁에서 탈락한 루저들의 공통점은 아버지 찬스가 없는 사람들이다. 홀어머니가 키운 아버지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부당한 처지에 있었거나 어머니마저 없다. 어머니는 아이를 극진히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하지만 아버지같이 사회에서 우선권을 주지 못한다. 모든 왕국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 현대사회에서도 권력자와 부자들은 대부분 아버지들이다. 오일남은 아버지의 은혜를 받지 못한 루저들에게 부유한 아버지 찬스를 쓰겠다고 접근하였다. 쌍문동에 사는 홀아비 성기훈도 자기 딸에게 아버지의 혜택을 주기위해 목숨이 걸린 오징어 게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그들이 아버지가 없어 밖에서 받은 부당한 대우, 불리한 출발이 그곳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을 ‘별이 없는 캄캄한 밤하늘’이라고 표현하였다. 별은 희망을 의미하고 희망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인 오징어 게임장보다 희망이 없는 사회가 더 지옥이었기 때문에 일말의 희망이 있는 오징어 게임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불행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나만 잘못 살고 이웃이 잘사는 사회는 살 낙이 없다. 목숨을 걸만한 기회가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활력이 넘치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이키고 싶은 것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오일남은 이런 인간의 습성을 잘 아는 초인이다.

게임의 법칙은 폭력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폭력에 순응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인내에는 걸맞은 보상이 따른다. 국가의 폭력, 공동체의 폭력을 감수하고 살았던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갈등의 해결 방법은 타협보다 폭력적 요소가 더 많다. 심심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재미로 관전하는 신들의 속성을 알아버린 성기훈은 어렵게 획득한 아버지 찬스를 쓰기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타러가는 도중에 불편부당한 그 족속들을 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으로 다시 뛰어든다.

오일남은 신처럼 죽어버렸다. 또 다른 신이 루저들을 게임에 초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자연 상태처럼 자유도가 넘치는 카오스적 상태로 방치하지 않는다. 문명은 카오스적인 혼돈의 세계를 질서의 코스모스 세계로 보다 정밀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예측 가능한 세계에 살고 싶은 것이 문명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카오스적인 자유도를 안정 상태로 돌이키는 장치가 필요하다.

공동체의 폭력은 평등사회를 바라는 우리들의 필요악이고 신이 설계한 세계보다 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가는 장치이다. 자유가 없으면 죽음이지만 평등이 없으면 폭력적 사회로 돌변한다. 그리스인들은 안티고네 같은 비극을 보여주면서 국가의 폭력에 순응하는 예방주사를 놓았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보면 폭력적인 세계를 또 다른 폭력으로 조절하는 요소가 꼭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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