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취미] 공포와 황홀의 이중주
[일과 취미] 공포와 황홀의 이중주
  • 사진 고원재 작가/글 : 유헌식 교수
  • 승인 2019.04.1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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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과 대지의 원초적 관계에 대한 상상 -

[고원재의 사진세계] 저녁 무렵 강철판에 식초, 식용유, 소금, 설탕을 뿌렸다. 다음 날 아침에 파인더로 바라본 철판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현란한 형태와 색채를 드러냈다. 강철판(Fe3C)에 뿌려진 조미재료들은 습기, 온도, 바람에 영향을 받아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사진작가 고원재 씨가 밝힌 작품 연출 과정이다. 그는 철판이 인간의 음식들을 먹고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그의 본업은 철스크랩을 판매하는 ‘블루카이로스’의 대표이다. 월간 약 5,000톤의 철스크랩을 현대제철과 포스코에 납품하고 있다. 취미 활동으로 시작한 사진작품 활동은 벌써 30여 년이 넘었다. 소나무 사진을 주로 찍었다가 바위 사진을 피사체로 삼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철판에 핀 녹을 작품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엘랑비탈'에 수록된 작품들은 강판과 조미료의 주체적인 융합, 그리고 촬영 시간과 조건의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철판위에 핀 녹을 현란한 형태의 색채로 연출하고 있다.
'엘랑비탈'에 수록된 작품들은 강판과 조미료의 주체적인 융합, 그리고 촬영 시간과 조건의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철판위에 핀 녹을 현란한 형태의 색채로 연출하고 있다.

 

고원재 씨의 ‘철판에 핀 녹’들은 기괴하고 음산한 사진도 있다.

이 작품들은 식초와 식용유가 작용한 결과였다. 조미재료를 뿌리지 않은 철판은 당시의 기상에 영향을 받은 자연적인 속성을 드러냈다. 고원재 씨의 작품은 ‘우연적인 효과의 미학’이다. 이렇게 철판 위에서 벌어진 화학반응의 효과는 예상할 수 없다. 물질의 반응은 인간의지를 벗어난 사안이다.

예술에서 사진만큼 우연과 행운에 의존하는 분야는 없다. 작업주체의 의지를 벗어나 자연의 효과에 의존하는 정도가 클수록 예술성과 작품성은 하락하기 마련이다. 고원재 씨가 발간한 사진집 <엘랑 비탈>에는 새로운 사진 예술의 경지를 만날 수 있다.

고원재의 작품에서 주로 보이는 파괴적이고 야생적이며 섬뜩한 이미지들은 생명이 출현하는 데 따른 원초적인 양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고원재 씨는 주변의 강철판과 조미재료의 우연적인 조우에 착안(着眼)하여 물리적으로는 약동하는 생명의 원초적인 활동을 시각화하고, 심미적으로는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는 현실적 혹은 허구적 이미지들을 효과적으로 재현해 냈다.

사진 : 고원재 작가(블루카이로스 대표) / 글 유헌식(문예평론가, 단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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