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과수성] 韓 최초 석판생산…세계 시장의 개척②
[창업과수성] 韓 최초 석판생산…세계 시장의 개척②
  • 김종대 페로타임즈 대표
  • 승인 2019.07.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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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석판은 다른 기업들이 해외에서 기술과 설비를 이전받아 결실을 얻을 때 스스로 생산 설비를 만들었다. 많은 기업들이 외화를 들여 플랜트를 구입해 사용할 때 직원을 교육시키면 서 플랜트를 직접 건설했다. 이 정신이 동양석 판을 우량기업으로 만든 핵심 기업문화이다. 창업자인 손열호 회장(작고)은 한국 최초로 석도강판을 생산했고, 수출길도 처음으로 개척했다. "불량품은 바다에 던져 버려라. 품질만이 국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는 신념을 강조, 끊임 없는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1994년 윌링 피츠버그사와 합작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오하이오 코팅스 컴퍼니를 건설한다.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은 TCC스틸(옛 동양석판)의 역사적 사실과 함께 창업자의 경영철학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글 싣는 순서 -

① ‘집념과 열정’ 석도산업 선구자의 길을 걷다
② 대량 생산체제의 구축세계 시장 개척의 선두
③ [르포] 美 현지 오하이오코팅 건설...90년대의 회상

동양석판의 기술로 만든 설비

1964년 여름,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자 군용 씨레이션 통조림 수요가 넘쳐났다. 동양석판은 특수를 맞았다. 첫 기계를 들여온 지 3년 만인 1965년 7월 열지식 석도금기 1대를 더 주문해 설치했다. 손 회장은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기계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동양석판의 기술직원들이 직접 기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설비를 멈춰가면서 기계를 하나씩 뜯어보았다. 부품 하나씩 일일이 다시 그리며 역으로 설계도를 만들어 갔다. 1966년 순수 동양석판의 힘으로 도금기 2대가 만들어졌다.

동양석판은 열지식 석도금기를 만들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연속소폭전기 석도금 설비의 설 계, 발주(국내 60%, 일본 40%), 조립, 설치까지 모두 자체 기술로 이뤄냈다. 1967년 4월 25일 연속소폭전기 석도금 설비의 준공을 마쳐 한국에서도 전기석도금강판(ET) 제품이 처음 생산됐다. 선진 기술인 연속광폭전기 석도금설비(1호 라인)도 동양석판의 순수 기술로 만들게 했다. 1969년 초 계획을 세워 일본에 기술직원들을 파견했다. 동양석판은 연속광폭전기 석도금설 비(1호 라인)를 자체 힘으로 설계, 완성했다.

포항공장 설립과 대량 생산

동양석판의 매출액은 해마다 30-40%씩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던 중 포항종합제철이 1977년부터 석도용 원판을 시험 생산하게 됐다. 원판 공급이 쉬워지면 석판 생산에도 도움 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공장을 포항으로 이전 했다.

9만6744㎡(2만 9265평)의 부지는 온통 개펄이었다. 자갈과 모래를 쏟아부어도 바닥이 탄탄해지지 않아 정지 작업부터 난공사였다. 공장건설 공사는 2년이 걸렸다. 내외자 합쳐 총 33억 5000만 원이 투입되었다. 1977년 7월 16일, 포항공장과 연속광폭전기 석도금 설비(2호 라인)가 완성됐다. 연간 12만 5000톤의 대단위 석판 생산설비를 갖춘 포항공장시대를 열었다.

수출 선두주자로 세계시장 개척

동양석판은 수출에 눈을 돌렸다. 대만 정부 입찰에 참가하여 해외 진출 기회를 잡았다. 이 전까지는 국내 통조림 수출에 따라 간접수출을 해왔지만 직접수출로 전환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 처음으로 수출품을 선적했다. 그해 수출 한 물량은 100만 달러였다. 당시 손 회장은 “불 량품은 바다에 던져 버려라. 품질만이 국제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고 말 했다.

1982년 2월 동양석판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개설했다. 또 기존 동남아시장 거래선 과도 유대를 강화했다. 동양석판은 1982년 제19 회 수출의 날에 ‘1천만불 수출의 탑' 을 받았다.

1983년에는 수출 물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1년 만에 수출 물량 200% 달성을 기록한 것은 업계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88올림픽 개최로 국 내수요가 살아나자 동양석판은 수출 전용 3호 라인을 설치했다. 드디어 동양석판은 연간35만 톤의 국내 최대 생산규모를 갖게 됐다.

끊임없는 석판 기술개발

동양석판은 새로운 기술개발과 설비에 과감한 투자를 지속했다. 1980년 국내 최초로 전 기아연도금강판(Zinc-Lite)을 자체 개발했다. 냉장고나 쇼케이스에 쓰였다. 1982년 초에는 건전지 외피 및 건강음료관 등에 사용되는 전기니켈도금강판(Nioe-Top) 설비를 갖췄다. 1985년에는 전량 수입하던 전기동도금강판(Copper-Lite)을 개발했다. 자동차 브레이크 튜브나 냉장고 후면의 프레온 가스 튜브로 쓰이는 특수 강판이다.

이즈음 손 회장은 ‘캔(CAN)의 나라’ 미국에 한국의 기술과 자본으로 공장을 짓겠다는 꿈을 실 천에 옮겼다. 한국보다 기술 수준이 높은 선진국 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손열호 창업자는 윌링 피츠버그사(Wheeling Pittsburgh Steel Corp.)와 접촉했다. 2년 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1994년) 윌링 피츠버그 사와 합작 투자계약을 맺었다.

오하이오 코팅스 컴퍼니(Ohio Coatings Company))라는 이름의 석판회사를 윌링 피츠버그사 냉연공장 옆에 세우기로 했다. 동양석판은 설비와 기술을 제공하고 윌링 피츠버그사는 원판을 공급기로 한 것이다. 당시 미국 현지 언론들은 ‘미국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신설되는 최신식 석판 도금설비’ 라고 호평했다.

미국 WPSC의 Bucha 회장은 1995년 8월 OCC 공장 내부 전경을 그린 액자를 손열호 회장에게 증정했다.
미국 WPSC의 Bucha 회장은 1995년 8월 OCC 공장 내부 전경을 그린 액자를 손열호 회장에게 증정했다.

과유불급과 붕우유신

동양석판의 계열사들은 모기업 의존율을 20% 되지 않게 했다. 지급 보증이나 자금 지원도 일체 하지 않는다. 손 회장은 생전에 "욕심을 다스리고, 분수에 맞는 삶을 살기를 거듭 당 부했다. 또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여, 좋은 친구, 존경심이 가는 친구를 사귀어 서로 아끼고 도와 같이 커나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손열호 창업자는 지난 1988년 1월 1일 39세 의 손봉락 사장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섰다. 창업자 역시 39세에 동양석판을 창립했던 일을 고려한 것이다. 동양석판의 오늘 은 손봉락 회장이 이끌고 있다. 이제 동양석판은 TCC라는 사명으로 국내 최고의 표면처리 메이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7월16일 창립 60주년을 맞은 TCC의 역사 속에는 열정과 도 전정신이 번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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