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과수성] TCC스틸 ‘집념과 열정’ 석도산업 선구자의 길을 걷다①
[창업과수성] TCC스틸 ‘집념과 열정’ 석도산업 선구자의 길을 걷다①
  • 김종대 페로타임즈 대표
  • 승인 2019.07.30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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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석판은 다른 기업들이 해외에서 기술과 설비를 이전받아 결실을 얻을 때 스스로 생산 설비를 만들었다. 많은 기업들이 외화를 들여 플랜트를 구입해 사용할 때 직원을 교육시키면 서 플랜트를 직접 건설했다. 이 정신이 동양석 판을 우량기업으로 만든 핵심 기업문화이다. 창업자인 손열호 회장(작고)은 한국 최초로 석도강판을 생산했고, 수출길도 처음으로 개척했다. "불량품은 바다에 던져 버려라. 품질만이 국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는 신념을 강조, 끊임 없는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1994년 윌링 피츠버그사와 합작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오하이오 코팅스 컴퍼니를 건설한다.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은 TCC스틸(옛 동양석판)의 역사적 사실과 함께 창업자의 경영철학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글 싣는 순서 -

① ‘집념과 열정’ 석도산업 선구자의 길을 걷다
② 대량 생산체제의 구축세계 시장 개척의 선두
③ [르포] 美 현지 오하이오코팅 건설...90년대의 회상

손열호 동양석판 창업자 인간 본위의 기업가 정신

동양석판의 창업자는 손열호 회장(작고)이다. 그는 1921년 10월(음력)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는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집안 에서 평탄하게 지냈다. 유교적 가치관은 훗날 인간적이고 신뢰감을 중시하는 경영철학의 배경이 됐다.

손열호 창업자는 17세에 급작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새로운 사업에 매진하다 과로와 좌절감으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성공 해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다짐한 것이 손열호 회장이 사업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손열호 회장은 형의 집에 머물며 장사를 시작했다. 헌 발동기를 수집해 일본에 되파는 일 이었다. 2~3년 만에 작은 사업을 할 만큼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일본으로의 운송이 단절됐다. 일본으로 기계를 보낼 수 없게 된 손 회장은 다른 사업을 모색해야 했다.
 

손열호 당시 동양석판 사장(사진 우측두번째)이 열지식 석도금 1호기 가동(1962.5)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국내최초 석도강판 공장의 성공적인 준공에 도움을 준 이들은 USOM 공업국장과 일본 마쓰다기계제작소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손열호 당시 동양석판 사장(사진 우측두번째)이 열지식 석도금 1호기 가동(1962.5)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국내최초 석도강판 공장의 성공적인 준공에 도움을 준 이들은 USOM 공업국장과 일본 마쓰다기계제작소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기계공구업으로 제조업 투신

1945년 10월, 서울 남대문로 5가에 ‘신라양행’을 차렸다. 농기계 매매업이다. 부지런함 덕 분에 사업은 번성했다. 1947년 사업을 확장했다. '대륙기계'라는 상호로 농기구 매매 전문 점포를 열고, 1년 뒤 대구에 지사를 냈다. 또 ‘삼양연마’라는 연마석 생산 공장을 인수했다.

손 회장의 공장은 낙동강 이남에 있었으므로 6.25전쟁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대구연탄주식회사를 인수하고 조개탄과 연탄을 제조했다. 삼양연마도 번창했다. 제조업에 자신이 붙은 손 회장은 사업 14년째가 되는 1959년에 새 사업을 한다.

손 회장은 부지 약 8984㎡(2717평) 공장에 AID 자금 10만 달러를 얻어 석판도금라인을 만들려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내놓은 매물을 인수 한다. 통조림공관 원재료인 석판을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석도강판의 미래 가치를 예견한 것이다. 1959년 7월 16 일, 손열호 회장은 남대문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이것이 동양석판의 첫 출범이었다.

석판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석판 제조 기술자가 없었다. 석판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도입한 기계는 자동차 부속품을 주석 도금하는 기계였다. 공장은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이때까지 모은 자금을 털어 인수한 공장의 주설비를 날리게 됐다. 국내 첫 생산 석판이니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다.

손 회장은 1961년 7월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동양강판(東洋鋼板)’을 방문했다. 이 회사는 원판 냉간압연 및 석판을 생산했다. 동양강판의 도움을 받아 열지식 석도금 설비를 설치키로 했다. 공장을 닫은 채 2년 동안 일본을 드나들며 기술을 익혔다.

동앙석판 설비 준공식은 공장인수 3년만인 1962년 5월7일에야 이루어졌다. 1962년 한국 최초의 석판이 생산됐다. 공장을 열고 생산을 못하던 3년간 포기를 모르고 배우는 데 매진한 결과였다.

원판 구입난 우직하게 돌파하다

당시 직원들은 사무직, 생산직을 합쳐 20명 정도였다. 손 회장은 공장에서 기거하며 공장 보수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석판 생산을 위한 원판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출장을 빈번히 다녔다. 고생 끝에 석판 생산에 성공했지만 판매가 잘 되지 않았다. 시장 조사를 해 보니 업체들의 창고에는 수입석판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원조자금으로 미국에서 석판을 마구 사들여 왔던 것이다. 미국에서 발생한 불랑품도 수입업 체들이 고철 값으로 들여와 팔고 있었다. 고급 석판이 헐값에 지천으로 널렸던 것이다. 하물며 페인트용기나 굴뚝 제조용으로도 쓰였다.

정부를 설득해서 외국산석판품목이 수입불 표시 품목으로 지정하게 했으나, 수입 석판이 소비될 때까지 국산 석판의 판매는 저조했다. 손 회장은 국산이 외국산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업자들을 찾아 나섰다. 제관공장이나 통조림조합에 출근하듯 매일 찾아가 설득했다. 시제품을 만들어 무료로 나눠주고 써 보길 권했다. 1963년부터 동양석판은 흑자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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